대한민국 정부 북한과 협상
우리 정부는 일본 적십자사 및 국제적십자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북한의 협상을 성상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북한은 응하지 않았다. 이에 우리나라 각지에서 북한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12개국 주요 항공사에서 해당 사건에 대해 규탄했다. 하지만 북한은 1970년 2월 5일 납북자들을 송환하겠다고 공표했으나 이 중 승무원 4명과 승객 8명은 송환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에 우리 정부는 전원 송환을 요구하며 송환 협상을 벌였지만 결국 2월 14일 판문점을 통해서 12명을 제외한 39명만 송환받고 사건이 종결됐다.보안검색 강화
해당 사건이 발생하면서 ‘항공기 탑승객에 대한 검문검색 강화’, ‘공항직원에 대한 사법권 부여’, ‘민간항공기 승무원들의 무기 휴대 허용’, ‘항공기 승객의 익명 및 타인 명의의 사용 금지’ 등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취하는 항공기 보안검색의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2001년 2월에는 송환되지 못한 승무원 중 한 명이었던 성경희가 제3차 이산가족 방북단으로 평양을 방문한 자신의 어머니를 만나기도 했다. 당시 정부는 채현덕이 범인이고, 그가 승객 조창희와 부종종사를 현혹해서 여객기를 납북시켰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 조중훈 대한항공 사장은 부종종사가 간첩행위를 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면서 단순추리에 의한 추정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3개월 후 피랍자 송환을 통해 대한항공 사장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에 중앙정보부와 치안국은 재조사를 했고, 고정 간첩 조창희가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월북을 계획해 승객으로 비행기 앞쪽 좌석에 앉았다가 납북한 것으로 드러났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