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2월 1일 파나마 운하 기공식
[역사속 오늘리뷰] 2월 1일 파나마 운하 기공식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4.02.0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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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881년 2월 1일은 파나마 운하 기공식 열린 날이다. 파나마 운하는 북미 파나마에 건설된 82km 운하로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다. 아메리카 대륙이 남북으로 길기 때문에 화물선이 대서양과 태평양을 오가기 위해서는 빙 돌아가야 한다. 따라서 파나마 운하는 화물선의 운항시간을 크게 단축시킬 수 있었다. 대항해 시대가 도래 하면서 운하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그때부터 파나마 운하를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1529년 당시는

1529년 스페인 에르난 코르테스가 필요성을 역설했고, 카를 5세가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하지만 프랑스 및 오스만 제국과 전면전으로 인한 전쟁비용이 많이 들면서 고민만 했지 추진을 하지 못했다. 그 이후 대항해시대에서 해양 주도권을 쥔 나라들은 파나마 운하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운하를 파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다만 대서양과 태평양 간의 해상무역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비용 대비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중국과 교역 늘어나면서

다만 18세기 이후 중국과의 교역이 늘어나면서 파나마 운하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다만 당시에는 대공사를 벌일 능력이 없었다. 이에 1880년 프랑스가 본격적인 프로젝트를 행하기 시작했다. 당시 기술자이면서 외교관인 페르디낭 마리 레셉스(1805~1894)가 이끄는 프랑스 공사팀이 맡았다. 문제는 난공사이기 때문에 사고나 질병으로 사망하는 인부들이 2만 2천여명이 됐다. 이에 프랑스는 막대한 피해만 보고 물러나야 했다. 1892년 프랑스는 파나마운하 관련 정치 스캔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 바통을 이어 받은 나라가 미국이었다.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 결과로 필리핀을 획득하면서 태평양으로의 진출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이에 파나마 운하를 파기 시작했다. 미국이 공사하는 동안 모기로 인한 말리리아 발병이 사망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모기 방역에 주력했다. 그러면서 사망자가 대폭 줄어들었다. 운하의 소유권과 관리권을 미국이 보유하면서 파나마 운하로 재미를 보고 있는 나라는 미국이다. 이에 현지 주민들은 미국에 대한 저항이 강하다. 이에 1977년 9월 7일 토리호스-카터 조약으로 파나마 운하 지대 반환을 했다. 그리고 1979년 10월 1일 파나마 운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을 파나마 측에 반환했으나 파나마인들은 운하 자체를 반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1999년 12월 14일 파나마 운하 반환 협정을 맺어 1999년 12월 31일 파나마 운하도 반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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