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2월 16일 백백교 사건 경찰 수사
[역사속 오늘리뷰] 2월 16일 백백교 사건 경찰 수사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4.02.16 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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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37년 2월 16일은 사이비 종교 백백교 사건을 경찰이 수사 개시한 날이다. 백백교는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동학 계통의 백도교에서 파생한 사이비 종교이다. 백도교의 교주가 1919년 사망하자 전용해가 교주가 되면서 백백교로 개칭했다. 종교사기, 재산갈취, 부녀자 정조 유린 등의 범죄를 저질렀고, 1937년까지 80여 차례 걸쳐 백백교 신도 350여명을 살해한 후 암매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백교 사건이 사회적 파장이 일어나면서 사이비 종교의 폐해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런 사이비 종교 논란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백백교는

백백교는 백도교에서 파생됐다. 백도교는 동학에서 파생됐다. 전정운이 1900년경 하산, 함경남도 문천군 운림면에서 전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도수가 1만명이 넘었다. 기본 교리는 동학의 교리를 기본으로 하고 주문을 열심히 외고 예배를 하면 무병장수하고 신선이 된다는 것이다. 전정운이 1919년 갑자기 사망했다. 그러자 둘째아들 전용해가 사망사실을 숨기고 교단을 수습했다. 1920년 경찰이 수사에 착수하면서 교주 전정운의 사망사실이 알려지면서 이탈하는 신도가 늘어났다. 교단운영과 유산분배를 두고 다툼이 벌어지면서 조직이 분열되면서 전정운의 큰아들 전용주는 1923년 인천도를 설립하고, 셋째는 도화교를 설립했다. 둘째 전용해는 백백교로 개칭했다. 백백교는 ‘한 사람의 흰 것으로 천하를 희게 하자’는 교리를 담았다. 주문을 외우면 무병장수, 불로불사가 되며 신선이 된다는 것이다.

세 분파 중에

세 분파 중에 교세가 크게 성장한 것은 백백교이다.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신도수가 8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교주 전용해는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대원님’으로 부르게 했다. 곧 물과 불로 심판하는 날이 오는데 살아남기 위해 교단에서 만든 전국 53곳의 피난처에 근거해야 한다면서 입교를 부추겼다. 도한 교주의 주도 하에 일제를 물리치고 독립을 하게 될 것이고, 독립된 후 그간의 헌금액수와 헌신에 따라 참의, 도지사, 군수, 경찰서장 등에 임명한다는 식으로 혹세무민하면서 신도들의 재산을 바치게 하는 등 갈취를 했다. 재산이 부족한 사람들은 딸을 바치게 했고, 미모가 뛰어난 여인은 교주의 첩이 됐다. 교주 전용해는 그들을 성폭행하고 성적 학대를 일삼았다.

유곤용에 의해

이런 악행을 거듭하고 있던 중 유곤용은 자신의 조부가 백백교에 빠져 수많은 재산을 헌납하고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된 것을 알게 됐다. 또한 자신의 여동생이 교주의 성노리개가 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에 부친을 통해 거액의 헌금을 미끼로 1937년 2월 16일 전용해를 만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복수를 감행했지만 수행원들의 방해로 실패하고 전용해는 도주했다. 이에 일본 경찰에 고발했다. 일본 경찰은 전용해 일당을 체포했지만 전용해를 체포하지 못하면서 전용해 일당을 대상으로 수사를 진행하면서 재산갈취, 정조유린, 살해암매장 등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20여개 비밀 아지트에서 암매장된 시신 314구를 발견했다. 또한 본격적인 검거에 나선지 50여일만에 경기도 용문산에서 전용해로 추정되는 시신이 발견됐다. 경찰은 전용해가 자살한 것으로 결론을 내리면서 사건수사는 일단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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