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토목국가
선덕여왕이 비판을 받는 이유는 사찰을 짓고 탑을 올리는 등 토목공사를 많이 했다는 점이다. 나라의 결속과 왕권을 공고히 한다는 측면에서 불교를 장려하고, 그것을 위해 토목공사를 했다. 하지만 현재에도 그러하지만 그 옛날에서 토목공사는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야 한다. 경상도 지역에 국한된 나라가 신라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규모 토목공사는 나라의 곳간을 비게 만든다. 이런 이유로 사찰을 세우고 탑을 세우는 것은 정치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후대 역사가들이 비담의 난이 선덕여왕에서 발생한 이유는 단순히 여자가 임금이 됐기 때문이 아니라 대규모 토목공사에 대한 반발 때문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그 이유는 비담의 난이 선덕여왕이 사망한 해인 647년에 발생했다는 것이다. 여자가 임금이기 때문에 난을 일으킨다면 선덕여왕이 취임한 해에 난을 일으켰어야 했다는 것이다.군사적인 실패
선덕여왕 시기는 백제 무왕과 의자왕 시기였다. 특히 대야성이 함락됐다는 것은 사실상 서라벌이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춘추가 사위인 김품석과 딸이 사망한 것에 대해 넋을 잃고 말을 잃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물론 김춘추가 딸을 잃어버린 아픔도 있었겠지만 대야성이라는 지역을 상실한 것 역시 큰 충격이 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만큼 선덕여왕은 군사적으로도 실패한 임금이었다. 그것은 대외적으로 압박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얼마나 다급하면 결국 김춘추를 당나라로 보내서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고, 당 태종은 조롱을 했을 정도였다.비담의 난, 단순히 여왕이기 때문은 아니다
선덕여왕이 사망한 해에 비담의 난이 발생한 것이 단순히 ‘여왕이 나라를 다스리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선덕여왕의 치세가 실패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대규모 토목공사에 백제로부터의 압박 등등에서 당 태종이 여왕이라는 이유로 조롱을 하면서 내부적으로 선덕여왕에 대한 불만이 쌓여 가고 있었다. 여기에 김유신으로 대변되는 가야계가 급속도로 신분 상승을 이뤄지는 것에 대해 내부적으로 불만이 상당했을 것으로 예측된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