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2월 21일 베르됭 전투 발발
[역사속 오늘리뷰] 2월 21일 베르됭 전투 발발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4.02.21 09: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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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16년 2월 21일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서부전선에서 독일 제국군과 프랑스군 간의 베르됭 전투가 발발한 날이다. 그해 12월까지 벌어진 전투이다. 소모전의 시초이자 참호전의 전형적 양상을 나타내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살육이 이뤄졌다. 제1차 세계대전이 참호전이라는 평가를 받게 한 전투였다. 해당 전투는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투 이후 동원 병력 규모 세계 기록을 깨부순 전투였다. 수나라는 100만 대군을 동원했지만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에 의해 고구려에 깨지면서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참호와 기관총 등장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적의 거점을 공격해서 점령하면 승리를 하는 양상이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참호와 기관총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수십만의 군인을 동원해도 적의 거점을 점령하지 못했다. 설사 점령을 한다고 해도 적은 1km 뒤로 물러나 또 다시 참호를 파고 기관총을 세웠다. 1915년 서부전선에서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선을 동쪽으로 밀어내기 위해 여러 차례 대규모 공세를 펼쳤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물론 독일군도 마찬가지였다. 동부전선에서 대승을 거두기는 했지만 서부전에서는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독일군은 서부전선을 뚫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고, 이에 눈여겨본 지역이 바로 베르됭이었다. 마침 프랑스군이 공세 준비에 정신을 팔리면서 독일군의 베르됭 공략 시도를 포착하지 못했다. 그리고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다. 제5군 14만명, 1200여문의 야포와 예비대를 투입해서 1916년 2월 21일 공세를 했다. 독일군의 공세도 초기에는 성공적이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지지부진해졌다. 그러면서 소모전으로 이어졌다. 물론 양군은 무의미한 소모전을 중지할 수 있었지만 그러하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인명 손실은 독일 43만명, 프랑스는 55만명이었다. 전사 및 실종자는 10~15만명 정도였다.

아무런 성과 내지 못해

베르됭 전투에서는 대규모 소모전을 펼쳤지만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러면서 독일군은 수세적 입장에서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베르됭 전투는 전세계적으로 반전 분위기를 만들었다. 종전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종전을 하지 못했다. 종전을 하게 된 것은 결국 미국의 개입에 의해서 힘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이다. 베르됭 전투는 현재 포격으로 패인 흔적이 남아있고, 아직 발견되지 못한 불발탄 및 지뢰로 인한 출입 통제지역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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