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범곤 순경이 궁류지서로
1981년 12월 30일 우범곤 순경은 궁류지서로 전근을 오게 됐고, 이웃집에 살던 전모양과 사귀게 됐다. 그리고 동거에 들어갔는데 전양 가족들은 만류를 했다. 그 이유는 바로 술버릇 때문이다. 술만 마시면 욕설과 폭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원래 101경비단 소속으로 청와대 경호를 근무했지만 결국 술로 인해 사고를 치면서 궁류지서로 전근을 오게 된 것이다. 그런 가운데 1982년 4월 26일 우범곤 순경은 집에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전모씨가 몸에 붙은 파리를 잡기 위해 손바닥으로 가슴을 쳤고, 그것을 계기로 말다툼을 했다. 우범곤 순경은 오후 4시 지서로 간 후 7시 30분 술에 취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전모양을 폭행했고, 이에 전모양 친척 언니가 만류를 하자 친척 언니의 뺨을 때렸다. 소란이 일어나자 동네 사람들이 몰려왔고, 사람들이 전모양을 두둔하자 우범곤 순경은 집을 나갔다.소주 마신 우범곤 순경
우범곤 순경은 지서에 배속된 육군 방위병들과 소주를 퍼마시고 있었는데 전모양 남동생이 찾아와서 항의를 하자 카빈총을 장전했고, 만류하는 방위병들을 향해 총을 쐈다. 그리고 무기고에 보관돼 있던 M2 카빈 2자루, 실탄 144발, 수류탄 7개 등을 탈취했다. 지서를 나선 우범곤 순경은 26세 남성을 향해 발포를 했고, 그 이후부터 만나는 마을사람들을 향해 닥치는 대로 총을 쐈다. 마을 통신을 차단하기 위해 궁류우체국으로 가서 여성 교환원 2명과 숙직 중이던 집배원 1명을 살해했다. 하지만 여성 교환원 전모씨가 숨지기 직전 마을 이장 집의 행정전화와 의령우체국 간의 코드를 연결하면서 주민이 신고를 할 수 있게 됐다. 그 이후 만나는 사람들 마다 닥치는 대로 총을 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새벽 우범곤 순경은 수류탄 2발을 터뜨리면서 폭사했다. 우범곤 순경은 어린이와 갓난아기까지 무차별로 살해했고, 평촌리 상갓집에서는 20여명을 사살하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사망자는 62명이고 부상자는 33명이지만 정확한 집계는 아니기 때문에 더 많은 사상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한심한 대응
이처럼 많은 사상자가 나선 것은 경찰의 대응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궁류지서장은 온천접대 후 술을 마시고 귀서한 시간이 밤 22시 50분이었다. 하지만 궁류지서장은 현장에 자신이 없었던 것이 다행이라면서 도피했다. 궁류지서 맞은편에 면사무소가 있었기 때문에 만약 방송을 했다면 희생자를 줄일 수 있었다. 결국 나중에 궁류지서 경찰들은 처벌을 받았다. 의령경찰서 경찰들이 결국 출동을 했지만 어두컴컴한 시골길에 피격을 당할 것을 두려워 마을 초입에서 진입을 하지 못했다. 국민을 지켜야 할 경찰이 흉악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과 경찰의 무능함 등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여론이 폭발하면서 전두환 정부의 내각 사퇴 압력에 직면했다. 그러자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직접 의령군을 찾아 주민에게 사과와 보상을 약속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부터 경찰공무원 임용규정을 개정하면서 인적성 검사와 전과 등을 조회하기 시작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