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의 음악에서 서민 음악으로
베토벤 이전까지만 해도 음악가는 왕이나 귀족에 소속돼 왕이나 귀족을 위한 음악을 작곡하고 연주를 했다. 하지만 베토벤은 음악을 귀족들만 누리는 예술이 아니라 대중과 함께 호흡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이념적으로 권위적인 정치 체계를 매우 싫어했으며 왕정이나 철권통치 시대가 저물고 민중이 모여 국가의 방향을 결정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나폴레옹이 나타났을 때 그를 칭송하면서 교향곡을 작곡했고, 교향곡 이름을 ‘보나파르트’라고 달았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자 격분해서 ‘보나파르트’라는 표지를 찢고, ‘에로이카’(영웅)으로 고치고 ‘한 사람의 영웅을 대상으로 한 추억을 기리고자 썼다’고 표기했다. 그만큼 왕정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이에 베토벤은 음악을 귀족의 전유물이 아닌 대중과 함께 향유하는 예술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방청권 서민에게 판매
이에 베토벤은 연주회를 열 때 귀족이 아닌 서민층에게 판매하는 사업적 판단도 했다. 그동안 음악가는 왕이나 귀족들을 위해 연주를 했지만 베토벤 이후부터 서민을 위해 연주를 하는 연주회가 탄생했다. 서민을 위해 연주를 하다보니 서민에게 악보를 판매하게 됐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저작권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졌다. 당시 작곡가들은 주로 귀족들의 후원금으로 생활했지만 베토벤은 출판사를 통해 악보를 판매하거나 연주회 방청권을 판매하는 방식으로 경제적 생활을 누렸다. 그러다보니 귀족들에 대한 혐오가 상당했다. 하루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대화를 하면서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귀족을 만나자 괴테는 귀족에게 인사를 했지만 베토벤은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괴테에게 “왜 우리가 저런 비열한 속물들한테 머리를 숙여야 합니까?”라고 핀잔했고, 다시는 괴테를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저작권을 지키면서도
베토벤은 저작권 지키기에 상당히 혈안이 됐다. 왜냐하면 다른 음악가들은 귀족들의 후원으로 생활이 가능했지만 베토벤은 자신이 벌어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에는 인색하지 않았다. 하루는 작은 시골 악단에 베토벤을 찾아온 적이 있는데 지역을 상징하는 음악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다만 시골이기 때문에 작곡료를 줄 돈이 조금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자 베토벤은 시골에 악단이 있는 것 자체만으로 대단하다면서 헐값에 작곡을 해줬다. 반면 작곡이나 연주를 의뢰하는 귀족들에게는 거액을 불렀고, 만약 귀족들이 거들먹거리면 화를 내고 무시하고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이같은 베토벤의 노력으로 음악가는 점차 저작권과 연주회 등으로 생활이 가능하게 되면서 더 이상 귀족에 얽매이는 그런 음악가가 사라지게 됐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