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한양, 10만명 주민 거주 계획 도시
[역사속 경제리뷰] 한양, 10만명 주민 거주 계획 도시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4.06.11 10: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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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한양은 4대문 안쪽을 의미한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면서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만든 계획도시가 바로 한양이다. 그것은 10만명의 주민이 거주할 수 있는 계획도시를 만든 것이다. 한양을 기본적으로 계획한 사람은 정도전이고, 이때 유교적 전통과 풍수지리를 참고했다. 유교적 전통에 의해 왕이 거주하는 궁궐(경복궁), 왕의 조상을 제사를 지내는 종묘,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 관청(6조)와 백성들이 물건을 거래하는 시장(시전)을 기본으로 갖췄다.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
한양은 유교 경전인 주례 ‘고공기’를 기초로 한다. ‘좌조우사左祖右社 면조후시面朝後市’를 바탕으로 한다. 즉, 궁궐을 등에 대고 왼쪽에는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종묘를,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궁궐 바로 앞에는 관청 즉, 6조 관청을 만들고 백성들이 지나다니는 6조거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종루 주변에 시장을 만들었다. 이른바 6의전으로 불리는 시전이다. 그리고 현재 종로가 됐다. 또한 청계천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남산골, 그리고 북쪽에는 북촌이 형성됐다. 북촌에는 고관대작들이 살았고, 남산골에는 몰락한 양반이나 중인들이 살았다. 조선은 유학을 숭상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성균관을 가장 중요시하게 됐다. 이에 오늘날 성균관대학교에 성균관을 차렸고, 성균관 유생에게 좋은 것만 먹이고 좋은 것만 입히고 싶으면서 반촌이 생겨났다.

경제시스템 만들어

종로에는 6의전 즉 시전이 있었고, 숭례문으로 들어오면 칠패가 있었다. 그것은 지방에 올라오는 건어물이나 농산물 등을 팔았던 농수산 시장이다. 그것이 현재 남대문시장이 됐다. 왕십리 일대에도 상권이 형성됐는데 강원도나 충주 지방에서 올라오는 물품들이 성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한양으로 천도를 하면서 전국의 모든 물자가 배를 통해 운반이 가능하게 됐다. 이른바 조운제도가 발달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마포나루가 부각됐다. 마포나루가 물살이 가장 약한 지역이었고, 숭례문(남대문)과 가깝기 때문이다. 이에 마포나루에 모든 물자가 모이게 되면서 여러 지역에 각 관청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신하들의 봉록 지급을 담당하는 창고인 광흥창이 만들어졌고, 군인들의 월급을 지급하는 창고인 군자감이 만들어졌다. 군자감은 오늘날 KT용산IDC에 위치해 있다. 구한말 일본군이 용산에 주둔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주한미군이 용산에 주둔한 이유도 군자감이 용산에 있었기 때문이다. 전국에 있던 소금들도 한양으로 몰리면서 소금창고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염창동이다. 즉, 소금 염(鹽), 창고 창(倉)이라고 해서 염창동이 됐다. 그리고 소금 장수들이 모여 소금을 파는 거리가 형성됐는데 염리동이다.

역참과 숙박시설

한양에는 역참과 숙박시설인 원(院)을 만들었다. 원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이태원’이다. 원은 교통의 요지에 설치가 되는데 유동 인구가 많으니 숙박시설을 만든 것이다. 예컨대 장호원, 조치원, 인덕원 등이 대표적이다. 역참은 마구간과 여관을 제공하는 장소를 말한다. 주로 조정의 문서를 전달하거나 외국 사신을 맞아 접대 등을 하는 기능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장소가 은평구 역촌동이나 강남구 역삼동, 양재역(말죽거리)에서 ‘역’이 바로 이 뜻이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누에를 치는 것을 장려했는데 누에를 치는 장소가 바로 ‘잠실’이다. 누에 치는 방이라는 뜻으로 잠실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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