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07년 7월 19일은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 순종 황제가 즉위한 날이다. 헤이그밀사 사건이 일본에 발각되면서 일본제국은 이를 빌미로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 시키고, 순종황제를 강제 즉위시켰다.
고종 황제는 황태자에게 국정의 섭정을 맡긴다는 조칙을 내렸지만 일본제국은 순종 황제의 즉위식을 밀어붙인 것이다. 이는 이완용과 송병준에 의해 주도가 됐고, 그 배후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다.
신원 불명 사람이 즉위식 참석
이날 즉위식이 열렸지만 고종 황제는 물론 순종 황제도 반발해서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아마도 내관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대역을 맡아 양위식을 올렸다.
고종실록을 살펴보면 “황태자가 정사를 대리하게 된 것을 진하(陳賀)하는 의식을 규례(規例)대로 중화전(中合殿)에 친림하는 것으로 마련하고, 황태자가 예를 행하는 의절(儀節)도 규례대로 마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권정례(權停例)로 하라.”하였다.
권장례는 황제가 참석해야 할 조정의 축하 의식에 황제가 나오지 않은 채 임시방편으로 거행한 식을 말한다. 흔한 사례는 아니었지만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종실록에는 ‘대리’라는 말이 나온다. 황태자에게 권력은 주지만 제위는 자신이 계속 갖고 있겠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일본제국은 이를 무시하고 고종 황제와 순종 황제가 없는 상태에서 강제로 즉위식을 거행한 것이다.
사실상 허수아비 황제
이토 히로부미는 식이 끝난 후 당시 일본 수상에게 ‘한제 양위식 거행 건(韓帝讓位式 擧行 件)’(왕전 往電 제76호)이라는 제목으로 외교 전보를 보냈다. 다만 일본 관료들 사이에서 이 의식을 과연 양위로 인정할 수 있겠냐는 논쟁이 벌어졌다.
민심도 들끓어서 성난 백성들이 이완용 집으로 몰려가 불을 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 대신들은 순종 황제를 허수아비 황제로 만들었다. 고종 황제가 사용하던 연호인 광무(光武)를 계속 사용하면 역사적 약점이 될 수 있다고 해서 새로운 연호인 ‘융희’(隆熙)를 사용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7월 24, 한일 신협약이 체결되어 입법권, 관리 임명권, 경찰권 등이 일본에게 강제로 넘어가게 됐으며 8월 1일에는 대한제국 군대를 협의 없이 강제 해산해 서울에서 대거 해산 군인들과 일본군 간의 전투가 크게 벌어지기도 했다.
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