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값 천정부지로 치솟고
베 10~20필 정도였던 소 한 마리 가격이 그해 40~50필 정도로 폭등했지만 구하기 어려웠다. 그야말로 민심은 흉흉하기에 이르렀다. 소가 사라진다는 것은 식량으로써 단백질 공급원이 끊기는 것도 중요했지만 농기구이면서 비료 수단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소가 사라지면 농업이 타격을 받고 국가 산업이 멈춰야 하는 상황이다. 이에 일단 조선 조정은 소의 도살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 이유는 소 역병이 발명하면 일단 잡아먹는 것이 낫다고 해서 도살이 횡행했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 조정은 우역에 감염되지 않은 제주도에서 가져오기로 했다. 하지만 살아남은 소는 3분의 1 정도였다. 문제는 제주도에서도 우역이 횡행했다. 이에 또 다른 방안으로 대마도에서 소를 가져오는 것을 고민했다. 하지만 일본 역시 우역이 시작되면서 고민을 하게 이르렀다. 이에 조선 조정이 눈을 돌린 곳은 바로 몽골이다. 일단 청나라의 허락을 받은 조선은 무장 심익이라는 사람을 소 매매 교섭단으로 몽골에 보냈다. 1638년 2월에 몽골로 떠난 사절단은 5월 한양에 도달했는데 185마리를 가져왔다. 이 185마리가 1660년대가 되면 1만 마리 정도로 늘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오늘날 한우의 유전자에 몽골 소 유전자가 포함되게 됐다. 오늘날 한우라고 하면 ‘누런 색깔의 소’를 생각하기 쉽지만 옛날에는 다양한 색깔의 소가 있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