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미팅·소개팅 그리고 야합
[역사속 경제리뷰] 미팅·소개팅 그리고 야합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6.22 11: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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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미팅 혹은 소개팅은 1:1 혹은 다수의 남녀가 만남을 갖는 행위를 말한다. 남녀가 만나 자유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시스템은 근대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과거에는 자유연애 따로, 결혼 따로였다. 특히 조선시대는 성리학의 나라였기 때문에 남녀의 자유연애에 대한 제한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역사는 남녀 만남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남녀의 만남은 현대에 들어와서 경제성장과 더불어 많은 변화를 겪기도 했다.

야합의 역사

야합은 사마천의 사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숙량흘은 안씨 처녀와 야합해 공자를 낳았다는 기록에서 야합이 유래됐다. 곧이곧대로 풀자면 남녀가 들판에서 정을 통했다는 말이다. 삼국사기에서도 ‘야합’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고구려 건국신화의 주인공 주몽 역시 해모수와 유화부인이 야합해서 태어났고, 신라 삼국통일을 이끈 김유신 장군도 김서현과 만명부인의 야합으로 태어났다. 야합이라는 것이 결국 집이 아닌 집밖에서 남녀가 만나 사랑을 나눈다는 것인데 그러자면 만남이 필요하다. 고구려 동맹, 부여 영고, 동예 무천 등 제천행사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그중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고구려 남녀들은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해 밤이면 여럿이 모여 자유롭게 사귀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 김현감호편에는 신라에서는 해마다 2월이 되면 홍륜사의 전탑을 도는 복회를 펼쳤고, 서라벌 남녀가 죄다 나와서 탑돌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김현이라는 사람이 밤이 되도록 혼자서 탑을 돌았다. 그런데 한 처녀가 염불을 하면서 따라 돌다가 서로 눈이 맞았고, 둘은 으슥한 곳으로 숨어 정을 통했다. 그런데 처녀는 실은 호랑이었고, 호랑이의 헌신적인 희생에 의해 김현이 벼슬길로 나아갔다고 돼있다. 즉, 탑돌이가 당시 남녀 연애의 행사였고, 탑돌이를 통해 서로가 서로에 대한 눈빛을 교환한 후 야합을 한 것이다. 고려시대는 불교의 나라이기 때문에 팔관회와 연등회를 가졌다. 역시 팔관회와 연등회에서 남녀가 만나 사랑을 나눴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신윤복 단오풍정
신윤복 단오풍정

다리밟기, 즉석 만남의 기록

조선시대는 성리학의 나라였기 때문에 성인 남녀가 만나는 것을 ‘공식적’으로는 금했다. 하지만 ‘공식적’일 뿐이었다. 비공식적으로는 남녀 만남을 허용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단오날’과 ‘정월 대보름’이다. 단오날에는 여자는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그네를 뛰었고, 남자는 씨름놀이를 했다. 여자가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그네를 뛰었다는 것은 이른바 섹스어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네를 뛰다보면 치마가 나풀거리기 때문이다. 남자가 씨름을 한다는 것은 웃통을 벗기 때문에 역시 섹스어필이다. 춘향전에서도 춘향이가 그네를 뛰고 그것을 이몽룡이 목격하면서 연애가 시작됐다는 점에서 단오날 그네를 뛰고 씨름놀이를 하는 것은 단순한 민속놀이가 아니라 섹스어필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월 대보름에는 답교놀이 즉 다리밟기를 하는데 이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보면 답교놀이의 성격이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다. 조선 명종 15년 풍기문란으로 답교놀이가 금지됐다. 풍기문란으로 답교놀이가 금지된 이유를 살펴보면 조선 실학자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에 의해만 “남녀가 쌍쌍이 짝을 지어 밤새도록 돌아다니면서 밤새우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사헌부가 이를 금지하고 잡아가기에 이르렀다”고 돼있다. 사실 정월대보름은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날이다. 조선시대는 초경 3점(오후 8시)부터 오경 3점(익일 오전 4시 30분)까지 금지했다. 그런데 유일하게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된 날이 바로 정월대보름이다. 더욱이 보름달이라는 자연조명까지 있기 때문에 남녀 모두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시선교환의 시간이 바로 답교놀이라고 할 수 있다. 답교놀이는 원래 액막이를 하기 위한 것이지만 남녀가 즉석 만남을 하기 위해 답교놀이를 한 셈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 한 장면.
드라마 응답하라 1994 한 장면.

미팅은 빵집에서

일제강점기에서도 남녀 만남이 이뤄졌는데 이때는 자유연애가 본격적으로 들어왔다. 다만 남녀 만남이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 주로 무도회장 등에서 즉석 만남을 가졌다. 그러다가 해방이 된 후 4.19 혁명을 거치면서 대학생들의 위상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대학생들의 자유연애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에 1960년대부터 미팅이 전성기를 이뤘다. 미팅을 하기 위해서는 티켓을 구입해야 했고, 주로 다방을 빌려 미팅을 했다. 당시 신문기사에는 네 번째 만날 때 손을 잡는 남녀가 많았다는 기록도 있다. 1970년대 고고장이 들어서거나 1980년대 디스코텍이 들어서면서 고팅이나 드스코팅이 성행하면서 바로 술집으로 향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상대방의 소지품을 선택해서 짝을 짓는 방법이 나온 것도 이 무렵이다. 1970년대부터 경제성장이 이뤄지면서 이른바 텐트와 코펠이 각 가정마다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에 청춘남녀들이 텐트와 코펠을 들고 야외로 나아가게 됐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웃 텐트의 남녀를 확인하고 서로 음식을 교환하거나 등등을 거치면서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즐기게 됐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서면서 그룹 미팅 대신 소개팅 형식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천리안 등 PC통신이 보급되면서 그룹 미팅 대신 소개팅 형식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남녀 만남을 주선하는 skylove(스카이러브) 등 남녀 즉석 만남 혹은 채팅 홈페이지 등이 등장했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소개팅 어플 등이 등장했다. 문제는 소개팅 홈페이지나 소개팅 어플 등을 통해 즉석 만남이 성매애 알선 등 범죄의 온상이 되면서 최근 소개팅업체들의 정화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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