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Hi스토리] 동화약품 그리고 활명수
[기업Hi스토리] 동화약품 그리고 활명수
  • 전완수 기자
  • 승인 2022.08.02 13: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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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전완수 기자] 동화약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고, 상징은 ‘부채’이다. 우리나라 역사와 함께 한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동화약품이 판매하는 ‘활명수’ 역시 우리의 근현대사와 함께 한 소화제이기도 하다. 이렇다보니 유사 제품도 많이 나온 것도 사실이다. ‘동화’라는 이름은 주역에서 나오는 말로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면 그 예리함이 쇠도 자를 수 있다. 나라가 화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들면 나라가 부강해지고 국민이 평안해진다”는 뜻을 품고 있다.
부채를 상징으로 사용한 이유는 紙竹相合 生氣淸風(지죽상합 생기청풍) 즉 종이와 대나무가 서로 합해 맑은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민족이 합심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궁중 선전관 출신

동화약품은 1897년 궁중 선전관 출신 노천 민병호와 아들 민강 등이 한성 서소문에 동화약방을 개업하고 활명수를 출시했다. 그리고 1910년 국내 최초로 상표등록했다. 이에 동화약방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제조회사이자 제약회사로, 또한 최초의 등록상표와 등록상품 등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초창기에는 활명수, 백응고, 인소환 등을 판매했지만 1929년 80여 조응로 늘어났다. 또한 민강은 1919년에 경성 연통부 행정책임자로서 활명수 판매수익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했다. 1930년 9월 25일 주식회사로 전환했지만 초대 사장이었던 민강은 독립운동에 힘쓰다 두 차례 걸친 옥고로 숨을 거뒀다. 이로 인해 사세가 기울어지는 듯 했지만 1937년 독립운동 동지 보당 윤창식이 인수하면서 재건에 들어갔다.

해방된 이후

해방된 조국이었지만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사세 확장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사회가 안정되면서 사세를 회복했고, 1962년 2월부터 동화약품공업(주)로 상호를 변경했고, 1967년 ‘까스활명수’를 시판했다. 1971년에 현대유리공업(주) 인수 후 1972년에 안양공장을 세워 치료제 의약품을 생산/판매하기 시작했다. 1973년부터 국내 최초로 희귀약품센터를 개설 후 중앙연구소를 세웠고, 1974년 동생 가송 윤광렬이 사장에 취임한 후 1976년부터 기업공개를 단행하고 살충제 ‘홈키파’를 출시했다. 1978년부터 전 사원 월급제 실시 후 1980년부터 덴마크 레오파마 사와 제휴해 ‘후시딘’을 생산했고, 1982년에 프랑스 에치팜덱소와 제휴로 간장약 ‘헬민’을 출시했다. 1985년에는 안양공장에 국제의약제조표준설비(KMGP)동을 개설 후 이듬해에 중앙연구소가 병역특례연구기관으로 지정됐다. 1997년 외환위기 후 이듬해 살충제 제조부문을 한국크로락스에 매각하고 2003년부터 아들 윤길준 사장이 취임한 후 3세 경영을 위한 밑밥이 마련됐고, 2008년부터 윤광렬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일선에서 물러나고 윤길준-도준 형제가 각각 부회장과 회장으로 승진해 3세 경영체제가 수립됐다.

국내 최장수 브랜드 ‘활명수’

동화약품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활명수’이다. 활명수는 우리나라 첫 번째 브랜드 상품이면서 최장수 브랜드이다. 그것은 대한제국 역사와 함께 했다. 창립자 민병호는 소화제를 만들어 활명액이란 이름으로 판매를 했는데 해당 약의 제조 아이디어는 제중원에 있던 친구가 가르쳐준 서양 의학에서 얻었다고 한다. 즉, 궁중 비방에 서양의학이 접목시켜서 개발된 것이 바로 활명수이다. 훗날 여기에 탄산이 첨가되면서 ‘까스활명수’가 완성됐다. 1910년 활명수 1병 값은 40전이었는데 당시 쌀 1되가 약 10전 정도 됐다. 그러다보니 유사상품이 쏟아졌고, 이에 동화약품은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부채표’를 만들어 상표등록했다. 활명수는 우리나라 독립운동 역사와 함께한 약품이다. 동화약품 사옥 내 상해임시정부 연락소인 연통부가 설치·운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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