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전완수 기자] 원진레이온 주식회사는 1964년 화신그룹 총수 박흥식이 일본 동양레이온의 중고기계를 들여와 1966년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도농리에 설립한 우리나라 유일의 비스코스 인견사 생산 공장이다.
흥한화학섬유(興韓化學纖維)라는 이름으로 설립, 한때 호황을 누리며 흑자를 냈지만 1960년대 중반 이후 합성섬유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한계 국면을 맞이했다.
그러면서 노동자를 보호하려는 안전설비가 결여되어 수많은 노동자를 신경독가스의 원료로 쓰이는 치명적인 유해물질인 이황화탄소에 노출시킴으로써 이들은 이황화탄소 중독 증세를 보였다. 마침내 원진레이온은 창립 29년 만인 1993년 6월 8일 폐업했다.
25,000시간 무재해 달성 표창
원진레이온은 설립초기부터 노후된 기기에서 발생한 불순물인 이황화탄소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직원 대부분이 가스 중독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과적으로 사망자 8명, 장애판정 637명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부는 1986년 25,000시간 무재해 달성으로 표창했다. 그만큼 산업재해에 대해 세간의 관심이 덜했던 시대였다.
훗날 조사에 따르면 이황화탄소의 발생과 유해함을 회사 측이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환기 설비를 설치하기는 했지만 거꾸로 설치하면서 이황화탄소가 공장 안으로 거꾸로 들어가는 현상이 발생했다.
여기에 노동자들이 머리를 박고 일해야 했기 때문에 환기 장치 유무와 관계 없이 이황화탄소를 직접 마셔야 했다.
원가협 그리고 박영숙·노무현 활약
1981년 첫 이황화탄소 중독 환자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관심이 없었다가 1988년 ‘문송면(당시 나이 17세) 수은 중독 사건’이 발생한 후 대책위원회가 꾸려지고, 단체와 직업병 피해자 그리고 가족들이 1988년 7월 23일 구리노동상담소 제안으로 ‘원진레이온 직업병 피해자 가족 협의회’(이하 원가협)를 결성했다.
비슷한 시기에 국회의원 박영숙, 노무현 등이 진상조사를 요구하고 나서면서 원진레이온 사태가 또 다른 변곡점을 맞이했다.
원가협은 88 서울올림픽 성화 봉송로를 막아 원진레이온 사태를 세상에 알리려 했다. 하지만 외국 언론의 보도를 염려한 노동부가 적극적인 태도를 내비춰 9월 14일 회사 측 대표와 원가협 및 대책위 대표가 모여 원진직업병 문제의 협상을 했다.
이에 1989년 8월 1차로 29명, 1993년 8월에는 257명이 직업병 판정을 받았다.
김봉환씨 별세 그리고 권경용씨 자살
그런데 김봉환씨는 직업병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1991년 별세했고, 같은 해 권경용씨는 방에 연탄불을 피워놓은 채 극약을 먹고 자살했다. 1992년 고정자씨는 정밀검진을 받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다가 목욕탕 수도꼭지에 스카프로 목을 맨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기나긴 투쟁을 했지만 산재로 인정받기 까지는 엄청난 고통이 수반됐다. 그리고 결국 회사는 1993년 6월 8일 폐쇄와 동시에 폐업됐다. 하지만 많은 노동자들이 큰 고통을 받아야 했다.
당시 의류 업계에서도 원진레이온이라고 하면 치를 떨었다고 한다. 영업사원으로 원진레이온에 계약 차 방문했을 때 노동자들의 모습은 산재로 인해 끔찍했다고 증언까지 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상처
원진레이온 사태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말들이 있다. 구리시 인창동에는 원진녹색병원이 있다. 직업병을 얻어 고통 받는 노동자들과 가족들을 위한 비영리법인인 원진재단이 만든 병원이다.
‘문송면 수은 중독 사건’과 ‘삼성전자 백혈병 사건’ 등과 더불어 ‘원진레이온 사태’는 20세기 기업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평가가 있다.
원진레이온 공장부지는 아파트를 건설해서 현재 아파트촌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아직도 원진레이온 사태를 기억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