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석전(石戰)
[역사속 경제리뷰] 석전(石戰)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8.10 13: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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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놀이 시연하는 김해시민들./사진=김해관광포털
석전놀이 시연하는 김해시민들./사진=김해관광포털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석전 즉 돌팔매 놀이는 우리나라 민속놀이 중 하나이다. 원래 단옷날에 했던 놀이다. 눈싸움과 비슷하지만 말 그대로 돌덩이를 상대편에게 던지는 놀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돌을 직접 마주보거 던지거나 지형지물을 활용해서 상대편 마을까지 밀어붙여 점령하면 승리를 한다. 이 과정에서 부상자가 속출하는 것은 기본이고, 사망자도 발생한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놀이’이기 때문이다.

고구려부터 있었던 놀이

석전은 고구려 때부터 있었던 놀이다. 역사서 ‘수서 고구려전’에 따르면 매년 정초 패수 위에 모여 좌우 두편으로 나눠 서로 돌을 던지면서 싸웠고, 고구려 국왕은 가마를 타고 와서 구경했다고 돼있다. 그만큼 석전은 오래된 민속놀이다. 구한말 선교사가 한반도를 밟았을 때 경악했던 것 중 하나가 석전이었다. 수십에서 수백의 장정들이 돌덩이를 던져대고, 곳곳에서 머리가 깨지거나 팔다리가 부러지는 것은 기본이고, 사망자가 속출했는데도 서로 웃으면서 즐겁게 놀고 있는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한 것이다. 1930년 1월 운산금광의 미국인 직원 클레어 헤스는 재미삼아 한편에 끼어 다른 편에 돌을 던졌는데 다른편 석전꾼의 머리에 적중했고, 머리가 터져서 즉사했다. 죽은 석전꾼 가족들에게 보복을 당할까 두려웠는데 아무도 문제를 삼지 않았다고 한다. 일반인들의 석전도 있었지만 ‘프로석전꾼’도 있었다. 구경꾼 앞에서 석전을 하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었다. 어떤 마을은 프로석전꾼을 고용해서 석전에 투입시키기도 했다. 부랑자는 프로석전꾼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기도 했다. 왜냐하면 부와 명예를 쥘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태조 이성계는 석전을 좋아했고, 태종 이방원은 중병을 앓다가도 석전경기가 열린다면 구경을 갔다. 다만 세종대왕은 유교적인 관점에서 석전을 좋게 보지 않아서 금지시켰다. 하지만 양녕대군 아들들이 석전을 벌이다가 사람이 죽어 나가자 세종대왕은 귀양을 보냈다.
을사조약에 항거해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를 향해 돌을 던지는 원태우 지사 기록화.
을사조약에 항거해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를 향해 돌을 던지는 원태우 지사 기록화.

이토 히로부미 저격한 돌팔매

프로석전꾼은 전쟁이 터지면 군부대에 편입이 된다. 일명 돌팔매 부대가 생겼다. 삼포왜란 당시 왜구가 쳐들어왔는데 조선 관군이 버텨내고 있는 가운데 안동 석전꾼들이 돌팔매 부대가 돼서 돌팔매질을 해서 왜구를 격퇴시켰다. 임진왜란 당시 죽령 방면 방어를 명받은 경상좌방어사 성응길이 긴급소집한 안동 석전꾼들로 일본군 2군 선견대를 격퇴시켰고, 가토 기요마사는 결국 진격로를 바꿔야 했다. 애국지사 원태우 지사는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동려 이만여, 남통봉, 김장성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고, 11월 22일 이토 히로부미가 경부선 기차를 타고 안양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다. 당시 원태우 지사는 술을 조금 마셔 취한 상태였다고 한다. 원래 철도 궤도 위에 돌을 놓고 열차를 전복시킬 계획이었다. 하지만 동료였던 이만여가 겁을 먹고 철로에 있던 돌을 치워버렸다. 이에 원태우 지사는 소리재 고개에서 돌을 던졌다. 원태우 지사가 던진 돌은 이토 히로부미가 앉은 자리의 창을 깨고 들어갔고, 유리파편이 이토히로부미 얼굴에 8군데나 박혔다. 당시 열차 속도가 20~30km였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정확하게 이토 히로부미에게 가격을 한 것이다. 그것은 석전의 민족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만약 이때 이토 히로부미가 원태우 지사에게 돌팔매로 사망했다면 역사는 또 달라졌을 것이다.
석전놀이 시연하는 김해시민들./사진=김해관광포털
석전놀이 시연하는 김해시민들./사진=김해관광포털

단옷날에서 정월대보름으로

석전은 원래 단옷날에 했던 민속놀이인데 어느 순간부터 정월대보름으로 옮겼다. 그 이유는 ‘모내기’ 때문이다. 단옷날은 보리를 수확하고, 볍씨를 뿌리기 직전 한가한 때였다. 당시 벼농사는 논에 직접 볍씨를 뿌리고 자라나게 했던 직파법이었다. 그러다보니 그 사이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그에 따라 단옷날에 석전이 이뤄졌다. 하지만 조선 중엽부터 모내기가 보급됐다. 모내기가 보급되면서 단옷날이 가장 바쁜 시기가 됐다. 또한 당시에는 물길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됐다. 그것은 이웃마을끼리도 싸워야 할 정도로 중요한 문제였다. 이런 이유로 어느 순간부터 석전을 통해 물길을 어떤 마을이 확보하느냐를 두고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부상을 당해도 사망자가 속출해도 마을주민들 입장에서는 중요한 놀이가 석전이 돼버렸다. 이런 이유로 조선 왕실은 계속해서 석전을 금했다. 하지만 석전은 계속 이뤄졌고, 일제강점기가 들어서면서 석전이 점차 사라졌다. 석전이 사라지게 되면서 또 다른 형태의 석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높은 장대 위에 박을 걸어놓고 돌을 던지는 것이었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돌이 고무공으로 바뀌게 됐으며 학교 운동회에서의 놀이로 변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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