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전기수
[역사속 경제리뷰] 전기수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10.17 13: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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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전기수란 조선 후기에 소설을 직업적으로 낭독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주로 한글소설을 읽으면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설화나 역사이야기, 그리고 중국 고전소설 등을 읽었다. 단순한 기계적인 낭독이 아니라 소설 속 등장인물의 역할에 맞춰 억양, 몸짓, 표정 등을 바꿔가면서 청중들의 몰입도를 높혔다.
전기수는 이야기의 중요한 장면이 진행될 때 말을 끊고 침묵을 지키다가 돈이 어느 정도 모이게 되면 이야기를 진행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것을 요전법이라고 한다. 양반가 집안에서 책을 읽어줄 때는 이미 돈을 받았기 때문에 모두 읽어주는 방식을 취했다. 여종이 책을 읽어주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를 ‘책비’(冊婢)라고 불렀다.

기수 발달한 사연

전기수는 주로 18세기 발달했다. 이는 조선중기부터 모내기(이양법)가 보급이 되면서 쌀 생산량이 증가했다. 그에 따라 상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조선중기부터 대동법이 보급이 되면서 세금을 주로 ‘쌀’로 지급을 하면서 상평통보가 널리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상평통보가 보급됐다는 것은 그만큼 상업이 발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5일장이 전국 곳곳에 열리게 되고 사람들이 장터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에 따라 책을 읽어주는 사람 즉 전기수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기수가 등장한 이유는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으면서 책은 주로 ‘필사본’이 보급됐다. 필사본이 보급됐다는 것은 널리 보급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또한 필사본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읽을 수 없을 정도의 악필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책을 읽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또한 한글을 암클 혹은 언문이라고 해서 경시했기 때문에 한글소설 책이 시중에 보급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세계 최초 인쇄술 자랑해도

세계 최초 인쇄술을 우리나라가 갖고 있어도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한자’라는 한계가 있다. 당시 책을 찍어내는 것은 ‘한자’로 찍어냈다. 한글로 책을 찍어내지 않았기 때문에 한글소설을 읽는 방법은 필사본 이외에 방법이 없었다. 고려시대 금속활자가 발명이 됐다고 해도 목판 인쇄에 비해 생산성이 심하게 낮았다. 활자끼리 맞물리게 하는 기술적인 부분이 미흡했기 때문에 한번에 통째로 찍어내야 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금속활자 한 판으로 하루에 찍어낼 수 있는 양이 하루에 열장도 안됐다. 또한 금속활자를 찍어내기 위해서는 ‘납’을 사용하거나 ‘구리’를 사용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 납이나 구리의 생산이 낮았다.

전기수가 발달할 수밖에

앞서 언급한대로 18세기 들어서면서 쌀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생활이 점차 넉넉해지면서 장터 문화가 발달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소식을 듣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것은 이야기꾼들 즉 전기수의 탄생을 만들어냈다. 전기수들은 주로 각 마을의 시장판이나 양반집을 돌아다니면서 글을 읽어줬다. 부녀자들을 위한 여자 전기수도 있었는데 흔히 책비라고 불렀다. 하지만 양반가와 유생들이 여자 전기수를 고용해서 문란한 사생활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했다. 예컨대 춘향전의 경우 원본은 19금 이상이다. 이를 양반가 혹은 유생들이 여자 전기수를 통해 읽게 하면서 그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했다.
'우리시대 마지막 전기수' 정규헌 선생./사진=연합뉴스
'우리시대 마지막 전기수' 정규헌 선생./사진=연합뉴스

살인사건도 발생

정조실록에 따르면 임경업전을 읽던 이업복이라는 전기수의 연기력이 너무 뛰어나면서 이업복을 임경업을 죽인 김자점으로 차각한 한 관중이 뛰어들어 담배로 자르는 칼로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정조는 “세상에 이런 허무맹랑한 죽음이 다 있는가”라면서 탄식을 했다고 기록돼 있다. 전기수는 일제강점기에도 존재했다. 그리고 1960년대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무성영화 시절에는 ‘성우’로서의 역할도 했다. 일제강점기나 1960년대까지 전기수가 명맥을 유지했던 이유는 라디오와 극장 등의 보급이 있었지만 라디오는 비싼 가전제품이었고, 영화 관람은 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러다가 60년대 라디오가 점차 대중화되면서 전기수들이 설자리가 잃어버렸고, 1970년대 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완전히 소멸됐다. 하지만 최근 유튜브가 새롭게 등장하면서 책을 읽어주는 유튜버들이 늘어나면서 ‘현대판 전기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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