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병훈 칼럼] 그대, 아직도 좌파혁명을 꿈꾸는가?
[백병훈 칼럼] 그대, 아직도 좌파혁명을 꿈꾸는가?
  • 백병훈
  • 승인 2022.12.20 09:4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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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 끝났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정권교체가 되자마자 대통령을 끌어내려 국가의 헤게모니를 탈환하겠다는 목소리를 도처에서 들을 수 있다. 매주 벌어지는 광화문 ‘대첩’과 여의도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다가 올 총선을 앞두고 또다시 이념의 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한국사회에서 좌익의 추억이 비옥한 토양을 만났다. 그들의 폭발성과 휘발성은 이미 ‘실력’으로 증명됐고 그들의 과녁은 적중하기도 했었다.

이런대도 지금의 상황을 ‘찻잔 속의 태풍’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내후년 4월에 보자’며 괘념치 않는 태세다. 인구의 34%를 차지하는 1,700만 MZ세대만 잡으면 총선에서 쉽게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다.

과연 그럴까? 호각만 불면 아스팔트 우파들이 달려 올 것이라고 믿는 것도 옛날이야기다. MZ세대는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다. 우파는 집권여당의 ‘식민지 농장’도 아니다. 국회 과반 의석수만 챙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과 독선의 집단최면에 다름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적은 왼쪽에 있지만, 위험은 항상 오른쪽에 있다. 그래서 끝났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이처럼 문제는 오른쪽의 적(敵)이다.

그것의 한국적 본질은 사상이념상의 좌편향이다. 한반도에서 좌파이념의 시원(始原)은 항일투쟁과 마르크스-레닌주의, 그리고 주체사상이었다. 정치화된 좌파철학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적 세계관이다. 러시아 볼쉐비키 혁명의 전야, 레닌은 무장투쟁에 앞서 사상투쟁이 벌어지며 사상이 대중을 장악하면 비할 데 없는 물질적 역량으로 변한다고 선동의 깃발을 올렸다.

그들에게 있어 계급투쟁의 역사는 사상투쟁의 역사였으며, 사상투쟁은 계급투쟁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그렇게 만들어 졌고, 한반도의 운명도 그렇게 만들어 졌다.

그러므로 사상투쟁의 진실을 보아야 한다. 해방된 프롤레타리아는 잠시 그들 지도자의 노래를 불렀고 평등을 혁명의 전리품으로 나누어 갖고자 했다. 그러나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는 경제적 부도 인간해방도 가져오지도 못했다.

그들이 바랐던 계급해방은 피의 투쟁을 불러왔고, 노동해방은 노동자계급을 거리로 몰아냈다.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이름으로 계급의 적뿐만 아니라 혁명의 동지들 마저도 쓸어버렸다. 그들의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름으로 배신당했던 것이다.

이 뿐이 아니다.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주체사상의 품안에서 북한의 인민은 결코 북한사회의 주인이 되지도 못했고, 모든 것을 결정할 권리를 갖지도 못했다.

오직 복종과 체념의 순응만이 존재했다. 그 후과는 참혹한 굶주림의 아사로 나타났고, 정치범 수용소를 만원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주체의 인민들이 ‘주체의 지상낙원’을 스스로 걸어서 탈출 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 일본공산당 기관지 ‘적기’(赤旗)가 주체사상의 인간중심론은 비과학적이며 반동적 관념론이라고 비판하였던 것도 결코 지나친 처사는 아니었다.

한 때, 혁명은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자들의 축제들이었고, 마르크시즘은 전 세계를 통틀어 혁명적 지식인의 라틴어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국가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버려 역사의 박물관으로 보낸다는 편집(偏執)된 사상과 증오의 계급의식이 가슴속에 남아 있는 한, 그것은 재앙일 뿐이다.

진정 역사의 박물관으로 가야할 자들이 있다면 진보의 이름으로 혁명적 사회변혁을 꿈꾸는 자들이다. 그들은 조국과 자신을 등지는 배교자(背敎者)의 운명을 예약한 사람들이다.

그래서일까? 당대 구소련 최고의 사회주의 이론가이자 당 중앙위원이며, 철학자인 알렉산드로 치코프가 작심하고 나섰다.

그는 동구 공산권이 붕괴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과학적 사회주의가 현실과 유리되면 그것은 공중에 뜬것이나 다름없다고 결론지었다. 스탈린주의는 무엇보다 볼쉐비키 군단(軍團)의 비극이요 드라마이며 고통이자 역사적 과오였다고 그는 쓰라린 자기비판을 가했다.

‘자기수정'(自己修正) 의지와 능력이 없는 이데올로기는 피압박 민중의 친구도, 혁명의 이데올로기도 될 수 없다는 치코프의 양심고백은 회색빛 지식인들의 가슴을 날카로운 비수로 도려냈을 터이다.

그해 년 말 ‘뉴욕타임즈’는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로 가는 가장 길고도 고통스러운 길 이었다”고 최종 판결문을 썼다. 역사가 허락했던 그날, 한국의 대학생들은 “산은 무너지고, 깃발은 내려지고, 동상은 파괴되었다”고 개탄했다.

차제에 빛바랜 좌파혁명을 꿈꾸는 한국사회 변혁세력에게 던져줄 말은 자기기만을 그만 두라는 것이다. 그것을 남과 북의 경계선상에 선 고독한 지식인의 고뇌라고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도 어느 거리를 헤매고 있을 이념의 보헤미안들, 감상적 민족주의 예찬론자들, 좌파이념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을 지식인들, 맹목적 통일지상주의자들, 가짜 진보주의자들, 그리고 권력의 언저리를 기웃거리는 기회주의적 한국사회 지성들에게 묻는다.

“그대, 아직도 좌파혁명을 꿈꾸는가?”

백병훈 약력

비교정치학 박사

한국정치공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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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용 2022-12-20 12:14:42
시대가 언제인데 아직도 이런 글이 씌여지냐? 누가 아직도 좌파혁명을 꿈구냐...지금이 박통시대여, 전통시대여.............좀 생산적인 글을 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