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여의도 비행장으로
이날 창랑호는 승객 31명과 승무원 3명을 태우고 오전 11시 30분 부산 수영비행장을 이룩해서 서울 여의도 비행장으로 가고 있었다. 12시 40분 평택 상공에서 김택선 등 남파공작원 5명에게 공중 납치됐고, 총기로 조종사를 위협해 기수를 북으로 돌렸다. 이윽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의 평양국제비행장에 강제로 착륙시켰다. 사건이 발생한 다음날인 17일 북한 당국은 언론을 통해 대한국민항공사가 ‘의거월북’ 했다고 발표했다. 즉 자신의 의지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체제 우월성을 북한 주민들에게 심어주기 위한 것이다. 사건이 발생하자 우리나라 국회는 22일 본회의에서 북한 만행을 규탄하는 결의를 했고, UN군에 참가한 16개국에 대해 협력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에 UN군은 24일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가 승객과 승무원, 기체의 조속한 송환을 북한에 요구했다. 이윽고 사건 발생 18일만인 3월 6일 승객과 승무원 26명은 판문점을 통해 송환됐지만 창랑호 기체는 끝내 반환받지 못했다.KNA 항공사는 몰락의 길로
창랑호 사건을 계기로 재발 방지를 위해 항공기 탑승자의 총기 등 위험물 소지에 대한 단속과 항공기 운항에 대한 공중 감시를 강화했다. 그러나 KNA 항공사는 창랑호 기체를 반환받지 못하면서 운항에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KNA 항공사는 만송호와 창랑호 그리고 우남호로 운항을 했었다. 그런데 만송호는 1957년 7월 7일 부산 숭여비행장에 착륙하는 도중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리고 창랑호가 납북되면서 이제 남은 것은 우남호 밖에 없었다. 이에 KNA는 1959년 4월 22일 DC-3기 1대를 추가 도입해서 국내선에 투입했고, 같은 해 7월 28일 미국 록히드사에서 콘스틀레이션 749A 4발 여객기 1대를 임차해 국내선과 국제선에 병용 취항했다. 그러나 그만큼 적자가 쌓일 수밖에 없었고, 이를 해소하지 못한 신용욱 대표는 1961년 7월 16일 투신자살하면서 1962년 11월 13일 KNA는 폐업처리됐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부 역시 KNA를 살리려고 했지만 워낙 많은 부채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살릴 수 없었다고 판단했고, 이에 국영기업으로 전환하기 위해 대한항공공사법을 제정했다. 이에 1962년 대한항공이 설립됐다. 하지만 대한항공공사가 결항률 18%를 기록하고 각종 정비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보고 민영화를 결정, 1968년 11월 1일 한진그룹이 대한항공을 인수하게 된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