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년 전에 다녀간 마을, 전에 없던 중식당 발견
- 순례자들 덕분에 한결 가볍게 느껴지는 11kg 배낭
[파이낸셜리뷰=양시영 인플루언서] 순례를 시작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오늘은 아기자기한 매력의 로스 아르코스(Los Arcos)를 떠나 로그로뇨(Logrono)로 향하는 날이다. 이번 구간은 중간에 쉴 수 있는 마을이 많지 않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출발해야 했다.
우리의 삶과 공통점이 많은 산티아고 순례길
작은 언덕과 산을 수없이 오르다 보면 내가 길을 걷는 건지, 길이 나를 걷는 건지, 그 경계가 모호해질 때가 있다. 그때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봤던 바르셀로나 출신 마르타를 우연히 만났고, 한참 수다 떨다 보니 노란 화살표도 제대로 보지 않은 채 걷게 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멀리서 누군가 우리를 부르기 시작했다. 마르타의 아버지였다. 마르타는 은퇴한 아버지와 함께 순례길에 올랐는데 그녀의 걸음이 아버지보다 빨라 나와 함께 걷게 되었고, 그러다 다른 방향으로 가는 우리를 아버님이 뒤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미 잘못된 방향으로 꽤 걸어와서 다시 반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했지만, 이제라도 다시 되돌아갈 수 있도록 길을 인도해 준 마르타의 아버지께 너무나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한참 또 마르타와 이야기를 나누며 로그로뇨로 향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선 순례자들을 위해 버스킹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소정의 관람료를 지불하고 앉아 혼자 휴식을 취하던 중 소중한 인연, 실비아를 만났다. 실비아는 홍콩계 캐나다인인데 이제 막 수의과를 졸업하고 순례길에 올랐다고 했다.
걸음 속도와 대화가 잘 맞아 실비아와 3시간쯤 더 걷다 보니 스웨덴 출신 티모 아저씨도 만나게 됐다. 티모 아저씨는 크고 작은 언덕들 때문에 오늘 순례가 쉽지 않았다고 하며, 한편으론 이 카미노가 우리의 삶과 닮은 점이 많은 거 같다고 말씀하셨다. 인생에도 많은 굴곡이 있을 텐데, 카미노로부터 미리 경험하고 배워나갈 수 있길 바란다는 덕담 또한 해 주셨다.
티모 아저씨의 말처럼 로그로뇨까지의 여정이 언덕도 많고 거리도 멀어 힘들었지만, 부디 오늘의 발걸음이 내 삶에 많은 지혜를 가져다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묵묵히 걸어 나갔다.
로그로뇨에 도착해 나는 기부제 공립 알베르게로 향했다. 대부분 기부제 알베르게는 숙박, 저녁 식사, 다음 날 아침 식사까지 모두 제공되며, 본인이 내고 싶은 만큼만 기부하고 떠나면 되는 방식이다. 순례자들의 기부금으로 계속 이 알베르게가 운영된다고 하니, 많은 사람이 이 아늑한 알베르게의 정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에 나도 두둑하게 기부하고 떠났다.
익숙한 듯 새로운 경험을 선사해 준 마을, 나헤라
전날 받은 따뜻한 에너지를 가득 품고 8일 차 순례에 나섰다. 나헤라(Najera)까지 향하는 오늘의 여정은 순례자들 사이 꽤 자비 없는 길로 유명한데, 그 이유는 12km 뒤에 있는 마을 하나가 이번 구간의 유일무이한 쉼터이기 때문이다. 점점 뜨거워지는 스페인의 더위로 강행군을 예상했지만, 전날 충분한 휴식을 취한 덕분인지 최상의 컨디션으로 보다 빠르게 걸을 수 있었다.
나헤라에 도착해 숙소를 구하던 중, 익숙한 건물 하나가 보였다. 첫 순례 때 묵었던 알베르게였다. 바로 그곳에 체크인한 뒤 내부를 둘러보니 정말 7년 전과 그대로였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빠르게 변한다고 생각했는데, 구조는 물론이고 분위기마저 그대로인 이곳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마을을 더 둘러보고자 여기저기 산책하던 중, 전엔 없었던 작은 중식당도 발견했다. 며칠 연거푸 빵과 감자튀김만 먹어 쌀밥이 필요했던 내게 단비 같은 곳이었다. 그렇게 볶음밥과 새우요리를 야무지게 먹으며 밥심을 충전했다.
샌들 신고 걷는 순례자, 대민 친구 아우
순례를 시작한 뒤로 매일 새벽 내내 비가 내렸다. 그래서인지 점차 길 상황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발도 진흙에 푹푹 빠지니 힘도 두세 배 드는 듯했다. 그러다 요 며칠 자주 만난 대만인 순례자 아우와 9일 차 여정을 함께 했는데, 아우는 운동화나 등산화가 아닌 샌들을 신고 걸어 진흙 길 순례에 애를 먹고 있다고 했다.
오늘도 한바탕 흙탕물에 빠진 샌들을 비닐봉지에 넣고 슬리퍼로 순례하는 아우의 모습을 보니, 한편으론 짠하기도, 귀엽기도 했다. 그런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아우는 “괜찮아, 근데 이따 발이랑 신발 열심히 씻긴 해야겠다, 냄새가 진흙이 아니라 소똥 같아”라고 말하며 소탈하게 웃었다. 아우는 정말 온전히 이 여정을 즐기는 순례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녀의 당찬 발걸음에 나는 연신 감탄하곤 했다.
오늘의 숙소, 산토도밍고(Santo Domingo de la Calzada) 알베르게는 이제껏 묵었던 공립 알베르게 중 가장 쾌적한 숙소였다. 침대도 160개로 넉넉하고 샤워실, 부엌, 세탁 공간도 꽤 넓어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순례자들의 필수 일과인 빨래까지 마친 뒤, 오늘은 레스토랑에서 순례자 메뉴를 먹어 보기로 했다.
순례자 메뉴는 평균 15유로 내외로 식당에서 제공하는 코스 요리인데, 에피타이저와 메인, 디저트, 와인 반병(물 한 병으로 대체 가능)이 기본이다. 열흘간 고생했다는 의미로 다소 가격대 있는 레스토랑에서 18유로짜리 순례자 메뉴를 먹으며 오늘의 순례를 마무리했다.
그렇게 나는 새로이 만난 사람들, 그새 익숙해진 사람들 덕분에 11kg 배낭을 메고 수십 킬로씩 걷는 것에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