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와대에서 걸려온 전화 한통
라면의 역사가 바뀌게 된 첫번째 사건은 바로 청와대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이었다. 라면은 1963년 9월 15일 삼양식품에서 라면을 생산한 것이 최초다. 하지만 당시 삼양식품은 일본 묘조식품으로부터 라면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순한 맛인데다가 닭고기를 육수로 사용했다. 이런 이유로 삼양라면이 국민들로부터 별다른 관심을 갖지 못했다. 그런데 1966년 어느날 삼양식품 사장실에 청와대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바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전화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 사람들은 얼큰한 국물을 좋아하닌 라면에 고춧가루를 넣어라고 했다. 이에 라면이 오늘날과 같이 빨간 국물로 탄생하게 됐다. 그리고 라면은 당시 혼분식 장려정책과 맞물리면서 국민들에게 날개 돋힌 듯 팔려 나갔다. 라면이 대중화가 시작된 것이다.2. 컵라면 출시+편의점 등장
1972년 삼양 컵라면이 출시됐다. 물론 봉지라면보다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초반에는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런데 이것이 바뀌는 사건이 발생했다. 1981년 농심이 '사발면'을 출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육개장 사발면을 내놓으면서 컵라면 시대가 도래하게 됐다. 컵라면은 1990년대 편의점이 등장하면서 더욱 보편화됐다. 편의점 안에서 라면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바쁜 현대인에게는 단비와 같았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 출출함을 달래기 위해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는 장면은 이제 흔한 장면이 됐다. 그리고 컵라면은 '장소의 제약'을 깨부셨다. 라면은 가정집에서 먹는 개념이 아니라 이제 야외에서도 뜨거운 물만 있으면 먹는 음식이 됐다. 이에 바닷가에서 산정상에서도 라면을 먹는 장면을 보는 것이 다반사가 됐다.3. 우지파동
라면 시장의 판도를 바꾸게 만든 사건 중에 하나가 바로 1989년 우지파동이다. 삼양라면은 공업용 소기름을 라면에 썼다는 이유로 관계자가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공업용 우지 파동은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철저한 수사를 직접 지시할 정도였다. 이에 삼양은 시중에 유통 중인 라면을 수거해서 폐기해야 할 정도가 됐다. 하지만 정부는 결국 '이상 없음'으로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삼양이 받은 이미지 타격은 회복하는데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다만 우지파동이 라면 시장의 판도를 바꾸게 한 결정적인 사건이었냐고 했을 때 농심 신라면이 그 이전에 출시해서 시장을 점차 잠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지파동이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즉, 우지파동이 아니더라도 라면 시장의 판도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4. IMF 파동 이후
국제통화기금(IMF)은 라면 소비가 쌀 소비를 위협하게 했다. IMF로 인해 국내 경제가 크게 위축되면서 그에 따라 쌀 소비 역시 위축되면서 그 대체품으로 라면 소비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식문화가 점차 서구화로 바뀌게 되면서 쌀 소비는 더욱 줄어들고, 그에 따라 라면 소비는 늘어나게 됐다. 라면 소비가 늘어나면서 라면은 더 이상 쌀의 대체품이 아니라 필수품이 됐다. 비상상황이 생기더라도 가장 필수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것이 바로 라면이 됐다. 집안 한 구석에 라면 한 봉지 없는 집이 없을 정도로 라면은 이제 필수품이 된 것이다.5. 영화 기생충 그리고 유튜브
우리나라 라면이 해외로 진출을 하게 된 계기는 드라마의 세계화 때문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영화 기생충이다. 극중에서 짜파게티와 너구리르 섞어 끓이는 짜파구리가 전세계에 알려지면서 덩달아 레시피가 전세계에 알려지면서 라면 수출도 증가하게 됐다. 하지만 세계가 라면을 주목하게 된 것은 2012년 출시된 불닭볶은면이다. 극강의 매운 맛으로 인해 국내에서는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유튜브를 통해 해외에 알려지게 되면서이다. 외국인들이 불닭볶은면을 먹는 먹방이 대유행을 하면서 덩달아 우리나라 라면이 해외에서 유행을 하기 시작했다. 유튜브 등에서 변종 레시피가 쏟아지면서 라면 먹방이 진화하고, 그에 따라 레시피도 진화하면서 덩달아 라면의 인기도 높아지고 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