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남하 막기 위해
영국은 끊임없이 조선에 개항을 요구했다. 1832년 순조 32년 로드 암허스트호가 충청도 홍주에 한달 정도 머물면서 통상을 요구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흥선대원군 집정 시기에도 계속해서 통상 요구를 했지만 실패했다.청나라 중재로
결국 청나라의 중재 하에 조영통상조약 회담에 들어갔다. 여러 논의 끝에 1883년 11월 26일 전문 13조의 조영수호통상조약이 조인됐고, 1884년 4월 28일에 해리 파크스와 김병시 사이에 비준이 교환됐다. 이 조약문은 당시에 영문 필사본으로 작성되었으며, 고종의 어보가 찍혀있다. 그리고 영국은 1885년 러시아 남하를 막는다는 목적으로 거문도를 불법적으로 점거했다. 조영수호통상조약은 누가 보더라도 영국에만 유리한 조약이었다. 그만큼 불평등 조약이었고, 이 조약에는 영국 군함이 개항장 이외에 조선 국내 어디서나 정박할 수 있고, 선원을 상륙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결국 거문도 점거 사건의 빌미를 제공했다. 오늘날에 보면 불평등 조약이지만 조선으로서는 최선의 조약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조약을 체결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던 상태에서 맺은 조약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조선은 국제사회에 대해 어두웠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