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분신정국으로 코너 몰린 노태우
동덕여대 사태가 1991년 분신정국 하에 한국외대 정원식 당시 총리의 밀가루 세례와 비슷하다는 평가도 있다. 당시 노태우 정권이었는데 ‘보통사람’을 표방하면서 출현한 정부였지만 신군부 세력이 여전히 정권 핵심 요직을 차지했다. 그러면서 대학가에서는 이에 대한 반발로 분신자살이 이어졌다. 그것은 여소야대 정국과 12.12 군사반란의 단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재평가 요구 등으로 인해 노태우 정권이 코너로 몰리자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 등 강경대응으로 이어졌다. 이에 학생들은 저항의 의미로 분신자살을 택했다. 특히 4월 26일 명지대학교 학생 강경대가 시위 도중 전경에게 집단폭행 당한 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1987년 이한열 열사의 죽음과 대비되면서 대학가와 운동권은 크게 격앙됐다. 그러면서 노태우 정권은 코너에 몰리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김지하 시인은 5월 5일 조선일보 칼럼에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면서 분신자살은 안된다고 호소했다. 게다가 서강대 총장 박홍 루카 신부는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면서 처음으로 ‘주사파’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런 가운데 시민들이 운동권에 등을 돌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이 바로 정원식 당시 총리 밀가루 세례 사건이었다.밀가루 세례로 기사회생
6월 3일 정원식 총리가 총리직을 수락하면서 시간강사로서 마지막 수업을 한국외대에서 하려고 등교했다. 하지만 운동권 학생들은 총리직 수락에 대한 반발이 극심했다. 결국 학생들은 정원식 총리에게 밀가루와 계란 세례를 퍼부었다. 그러면서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 이것이 TV에 고스란히 생중계됐고, 신문 1면을 장식했다. 그러면서 국민의 시선은 완전히 차가워졌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운동권 학생들에 대해 국민적 시선은 우호적이었다. 왜냐하면 87년 민주화운동을 이뤄낸 것도 운동권 학생들의 노력 때문이기 때문에 국민들은 노태우 정권 편이 아니라 학생들 편이었다. 그런데 운동권 학생들이 정원식 총리에게 밀가루 세례를 퍼붓자 “어떻게 학생이 스승에게 밀가루 세례를 퍼붓냐”면서 국민들이 분노했다. 언론들은 가급적 운동권 학생들 편에서 보도했지만 이미 국민들은 분노가 하늘을 찌르게 되면서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비판 여론은 산을 이뤘다. 노태우 정권은 기회를 잡았다면서 ‘반인륜적 행동’으로 규정하고 ‘용공세력’을 뿌리뽑아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운동권은 대대적인 저항을 하려고 했지만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민심은 그들의 비호하지 못했다. 6월 20일 광역의회 선거에서 야당 후보들은 줄줄이 낙선하고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지방의회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