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채혜린 기자]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100년 전 이날 나라를 빼앗긴 우리 조국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리고 수많은 독립운동을 통해 결국 주권을 쟁취했고, 오늘날 대한민국이 탄생됐다.
우리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선각자들은 물론 민초들까지 독립운동에 나섰고, 민족기업으로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기업들도 있다.
그리고 그들 기업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경제를 떠받치는 기업이 됐다. 흔히 5대 독립운동 기업으로 분류되는데 LG, GS, 동화약품, 유한양행, 교보생명 등이다.
그들은 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저항하면서 독립운동을 위해 나섰고, 타의 모범이 되는 기업이 됐다.
1만원 거금 쾌척한 LG
LG 창업주 연암 구인회 회장은 1031년 경남 진주에서 ‘구인상회’라는 포목상을 창업했다. 1942년 백산 안희제 선생이 구 회장을 찾았다.
안 선생은 구 회장에게 독립자금을 부탁했는데 당시 금액으로 1만원이었다. 이는 구인상회 자본금 2천원의 5배이면서 80kg 쌀 500가마니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금액도 금액이지만 독립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일제에게 알려지게 되면 구인상회는 쑥대밭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기에 독립자금 지원은 쉬운 결정은 아니다.
하지만 구 회장은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독립자금을 내놓았다. 이 자금은 중국 중경에 위치한 임시정부에 보내지면서 독립운동에 큰 밑거름이 됐다.
임시정부의 국내 전진기지, 동화약품
동화약품하면 떠오르는 것이 ‘부채표 활명수’다. 궁중 선전관 출신인 동화약품 창업자 민병호씨는 대한제국의 식산흥업정책에 부응, 1897년 자신의 집에서 동화약방을 만들고 사장에 아들 민강씨를 임명했다.
동화약방은 활명수를 판매했고, 얻은 수익은 독립자금으로 조달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민 사장은 1909년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대동단에 가입해 의친왕 이강을 상해로 탈출시켜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민 사장은 일제강점기 때 수차례 옥고를 치르면서 옥살이와 고문 후유증으로 1931년 별세했다. 정부는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고, 시신은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1937년 동화약방은 보당 윤창식씨에게 넘어가면서 ‘동화약품 공업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꿨고, 광복군 중대장을 지낸 아들 윤광열 전 회장이 이어갔다.
활명수는 우리나라 최장수 브랜드로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브랜드이기도 하다.
50대 나이에 광복군이 된 유한양행 유일한 박사
유일한 박사는 1926년 ‘건강한 국민만이 장차 교육도 받을 수 있고 나라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 하에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당시 양약(洋藥)은 일본의 허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일본 제약사들이 양약 시장을 독점했다. 이에 유한양행의 출현은 일본 제약사들로부터 경제적 수탈을 방어하는 전초기지가 됐다.
유한양행은 피부병, 결핵, 학질, 기생충 등의 치료제 개발에 힘을 썼고, 1930년대 미국 아보트사와 합작으로 중국 대련에 약품창고를 세우고, 안티푸라민을 자체 개발했다. 안티푸라민은 국민의 만병통치약으로 불릴 정도로 인기몰이를 했다. 또한 판매대금은 독립자금으로 사용됐다.
유 박사는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전략정보국(OSS) 한국 담당 고문으로 참전했다.
그리고 로스엔젤레스에서 ‘한인국방경위대’를 편성했고, 맹호군으로 이름을 변경해 임시정부 군사위원회의 인준을 받았다.
특히 한국인으로 구성된 특수부대를 한국과 일본에 침투시키려 한 미국의 냅코(NAPKO) 작전에 50대의 나이로 고된 훈련을 겪으며 참여했는데, 이 작전은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실행되지는 못했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교보생명 창업주 일가
교보생명의 창업주 일가의 신예범, 신용국, 신용호씨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의 조부 신예범씨는 일제강점기 시대 야학을 열어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웠고, 일본인 지주의 농민수탈에 항의하는 소작쟁의를 주도했다.
큰 아들 신용국씨는 20살 때 3.1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호남지방 항일운동을 전개하면서 옥살이를 했다.
신용호 교보생명 창업주는 이육사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독립운동의 젖줄 GS
GS그룹 창업주인 허만정 선생은 1914년 백산상회 설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한다. 자본금 13만원으로 설립된 이 상회는 영남지방 대지주 총 32명이 주주로 참여하고, 곡물, 면직물, 해산물 등을 판매한다.
하지만 속내는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위한 젖줄과 마찬가지였다. 백산상회는 가게의 이익금 뿐만 아니라 원금도 독립자금으로 사용하면서 경영상태는 언제나 적자였다.
백산상회는 대구, 서울, 원산 등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면서 자금 조달을 했다. 하지만 일제는 백산상회가 독립자금 조달처라는 것을 알게 되고, 결국 해산된다. 해방 이후 허만정 선생은 LG그룹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에게 사업자금 투자와 경영 참여를 제의하면서 LG그룹과 GS그룹이 탄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