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 1. 나의 출생과 어린 시절
(1) 부모님의 고향은 이북이시다.
나는 평안북도 창성군 대창면에서 사시다 해방이후 1946년 남하하신 구산의 2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이신 구산 강오빈 선생님은 1923. 5. 8 평안북도 창성군 대창면 수려한 산 아홉 봉오리(九峰山)가 있는 산골에서 명덕선생님의 2남으로 태어 나셨다.
보성고등보통학교, 일본 동경명치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시고 1946년 12월1일부터 교육계에 투신 우리나라 중 고등 교육 발전을 위해 한 평생 헌신하셨다.
모친 선우영희 여사는 독립투사 선우욱의 3녀로 1925년 12월 3일 만주에서 태어나 1945년 아버지와 결혼하셔서 3남 3녀를 바르게 키우셨다.
부친께서는 창성군 강씨회(姜氏會)를 발기하셔서 제2차 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38선에 의하여 국토가 양단돼 이북이 공산권으로 들어감으로 인해 재산을 몰수당하고 자유를 찾아 사선(死線)을 넘어 월남 하신 분들을 모으셨다.
강씨 중기 시조(姜氏中期始祖)는 박사공(博士公)인바, 우리 조상은 고려시대에는 세자의 스승이나 부마를 지내시거나 정승을 지내셨으며, 이조시대에 들어와서는 고려왕조를 끝까지 지키다가 일시 몰락의 위기를 겪은바 있었고, 연산군조에 와서는 다시 판서 정승 등으로 나라를 위하여 이바지 하고 오던 중, 정의감이 강하신 우리 조상 중에는 세력 타툼과 당쟁의 희생이 돼 북쪽 멀리 압록강 연안과 중간에 자리 잡은 평안북도 창성군으로 이거(移居)하게 된 것이다.
(2) ‘용두동’에서 태어나 ‘목동’에 살다
나는 1948년 우리민족 최대의 명절인 한가위 날 휘영찬 보름달을 보며 이 땅에 태어났다.
부 구산 강오빈 (초대 상계중학교 교장, 명덕 할아버지의 2남))과 모 선우영희(독립운동가 선우욱의 막내딸)의 2번째 아들로 1948년 9월 17일(추석날) 충청남도 대전시 용두동 34번지에서 태어났다. 3남3녀 6남매의 둘째인 것이다.
우리 한국에 용두(龍頭)라는 지명은 너무나 많다. 용은 실존하는 동물이 아니라 구름을 타고 다닌다는 용은 임금을 비유하는 제왕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우리 부친은 ‘용’과의 관계가 특수한 것 같다. 부친이 태어나신 곳은 평안북도 창성군 대창면 봉용(鳳龍)동이다.
종전과 더불어 남하하신 부친께서는 잠시 서울에서 수도경비대 순경, 경사로 근무하시다가, 1946년 12월 대전사범학교 교훈으로 임명받아 대전에 정착하시게 되었다.
그 때 대전사범학교 관사(官舍)에 살게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내가 태어난 대전시 용두동 34번지 였다. 1953년 10월 16일, 부친께서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 교사로 전근(轉勤)하게 되어 관사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그곳이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용두동 138번지 였다.
그 후 1964년 그 관사를 나오지 않을 수 없어 새로 집을 사고 이사한 곳이 바로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용두동 191-6 번지로 나의 청소년 시절, 총각시절을 보낸 집이다.
1948년 9월 대전시 ‘용두동‘에서 태어나, 1950년 6월 대전시 ’목동‘으로 이사를 가서 6살 때까지 유년시절을 보냈다. 유년 시절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너무 예쁘고 잘 생겨서 목동에 사시는 동네 사람들이 많이 귀여워했다고 하신다.
그런데 ’용두동’과 ‘목동’은 내 생애 잊혀 질 수 없는 특수한 관계임에 틀림없다. 대전 ‘용두동’에서 태어나 유아시절 대전 ‘목동’에 살다가, 서울 ‘용두동’으로 이사와 ‘용두동’에서 청소년시절을 보내고 결혼 후 서울 양천구 ‘목동’ 목동신시가지 아파트에서 25년을 살았다는 사실이다.
특별한 의미를 둘 필요는 없지만 왜 ‘용두동’과 ‘목동’이 나와 함께 하였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슨 특별한 섭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