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전완수 기자] 명성그룹은 1968년~1983년까지 존재한 대기업이었다. 명성그룹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전두환 정권의 대표적인 기업 길들이기 희생양이면서도 제5공화국 시절 3대 금융 부정사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명성그룹을 한눈에 평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일개 운수회사가 어느날 갑자기 23개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으로 성장한 이면에는 석연찮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단순히 전두환 신군부의 눈밖에 나서 해체됐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기업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전두환 신군부의 입김이 아예 작용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석연찮은 회사이기도 하다.
일개 운수회사가
1968년 호남비료 출신이던 김호철은 택시 운수업체 ‘금강운수’를 차리면서 사업을 시작했다. 금강운수는 훗날 130여대 코로나 택시를 거느리면서 대형 운수업체가 됐고, 1976년 ‘명성관광’을 세우게 됐다. 그러면서 당시 생소한 ‘콘도미니엄’ 개념을 세우면서 숙박업과 골프장을 영위하면서 사업을 확장했다.
그 이면에는 1979년 4월 김철호 회장과 상업은행 서울 혜화동 지점 ‘대리’와의 관계에 있었다. 부도직전이었던 명성관광이 발행한 어음의 교환자금 부족액에 대한 연장 결제 문제로 친분을 쌓았다.
그리고 4년여 동안 상업은행 대리는 사채중개인을 통해 예금 형식을 빈 사채로 모집하고, 그 가운데 일부를 인출해 별도로 개설한 계좌에 입금시킨 후 명성그룹 회장에게 융통해줬다.
일허게 조달된 자금으로 65만평 규모의 골프장 명성컨트리클럽을 개장했고, 이후 금강개발, 명성콘도미니엄, 남태평양레저타운을 비롯한 23개 계열사를 거느리는 최초이자 최대 관광·레저 전문 그룹으로 탄생하게 된다.
명성그룹은 강원도 일대에 콘도, 호텔, 골프장, 수영장 등 온갖 종류의 레저시설을 갖춘 대형 레저 타운을 조정했는데 이것이 ‘설악권 레저타운’이다. 그리고 식품사업이 진출하면서 엘더베리 주스를 만들었고, 1983년에 노르웨이 CHM 사와 합작해 국내 최초 스포츠음료 엑셀원(XL-1)을 시판했다.
검찰에 구속되면서 드러나
1983년 8월 17일 김호철 회장과 상업은행 대리는 검찰에 의해 구속되면서 수사를 받게 됐다. 수사 결과에 따르면 상업은행 대리는 1천여명이 넘는 전주(錢主)들을 상대로 사채자금 1066억 원을 조성했는데, 이 가운데 544억 원은 사채업자에게 주는 선이자로 운용했으며, 512억 원은 명성그룹 회장에게 주어 명성그룹 기업자금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당시 은행 엄부가 완전히 전산화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정전에 대비해 수기통장을 병용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에 상업은행 대리는 사채 중개인에게 예고된 예금인(사채 전주)이 1억원을 맡기면 수기통장에는 1억원을 기재하고 원장에는 100만원만 기재했다. 그리고 나머지 차액 9천900만원은 자신이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계좌에 입금하는 방식을 취했다.
아울러 거래신청서나 이자전표의 인감 란에 예금주의 인장을 받아 날인하면서 인근에 둔 백지 예금청구서나 지급전표에도 몰래 미리 찍어 놓고, 이후 이를 필요할 때 인출 수단으로 활용했다.
결국 1984년 8월 14일 대법원은 김호철 회장에게 징역 15년, 벌금 79억 3000만 원을, 상업은행 대리에게 징역 12년을 선고했고, 그 외에 이들에게 협조한 전 행원과 전 교통부 장관, 전 건설부 국토계획국장 등에게도 형사처벌을 내렸다.
이들의 죄명은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업무상 배임 및 횡령, 뇌물 수수 및 공여, 조세범처벌법 위반 등이었다.
전두환 신군부의 희생양?
일각에서는 전두환 신군부의 희생양이라는 평가도 있는데 그러기에는 자금 모집이 너무 불법적이었다는 점이다.
전두환 정권 당시 해체된 국제그룹과는 또 다른 성격이라는 것이다. 전두환 정권 당시 국제그룹은 전두환에 밉보였기 때문에 해체된 것이다.
반면 명성그룹은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영동개발진흥사건과 함께 5공 3대 금융부정 사건 중 하나였다.
명성그룹의 레저사업은 한국화약그룹으로 넘어갔고, 현재 한화호텔앤드리조트가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