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전완수 기자] 삼호그룹은 1952년~1984년까지 우리나라 건설산업의 한축을 담당하던 기업집단이다. 한때 정주영 명예회장이 이끌던 현대건설과 더불어 자웅을 겨루던 건설특화 기업집단이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 때 국제그룹이 공중분해된 것처럼 삼호그룹도 공중분해 됐다. 국제그룹이 워낙 이슈화가 됐기 때문에 삼호그룹은 상대적으로 묻혔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정권 때 사라진 그룹 중에 하나이다. 다만 국제그룹과 같이 밉보여서 공중분해 됐는지 여부는 후대의 평가가 다소 엇갈리기도 하다.
메리야스 제조업체에서
1952년 조봉구 창업주가 메리야스 제조업체인 ‘동광기업’을 설립한 것이 그룹의 기원이다. 소모방제품 '아리랑 모사' 생산 및 스웨터 수출로 기반을 잡다가 1960년대부터 서울 강남 부동산에 투자하면서 1966년에 청구화공 및 수원컨트리클럽을 세웠다.
이어 1974년에 동광기업에서 개발부를 떼어 기존 건설회사인 천광사와 합쳐 ‘삼호주택’을 출범시켜 주택건설사업에 손을 뻗었다. 1977년 삼호개발을 세워 호텔 및 레저사업에 손을 뻗고 쿠웨이트 진출을 시초로 해외건설사업에도 두각을 드러냈다.
이후 1978년 삼호유통까지 세워 슈퍼마켓 업종에도 손을 뻗었지만 1980년대 초 중동 붐이 꺼지자 적자가 계속돼 부실화됐다. 결국 전두환 시절 1984년에 산업합리화조치로 해체 수순을 밟았고 대다수의 계열사들은 대림그룹에 매각됐다.
전두환에 밉보여 해체?
조봉구 창업주는 1988년 노태우 정권 출범 후 ‘5공 청산 열풍’에 편승하면서 삼호그룹이 전두환 정권에 밉보여 해체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노태우 정권ㅇ르 상대로 그룹 환수를 촉구하는 진정서를 보냈지만 노태우 정권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1993년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또 다시 진정서를 냈지만 반응이 없었다.
이에 현지 법무법인 그렌 브로일렛 테일러&필러 LLP로부터 무료 수임을 받아 1997년 12월 대림그룹과 조흥은행을 상대로 LA 지방법원에 ‘재산권 반환소송’을 냈으나 이 마저도 묻혔다.
아직도 논란은
조봉구 창업자는 전두환 정권의 서슬퍼런 칼날에 못 이겨 삼호그룹을 대림그룹으로 넘겼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만제 당시 재무부 장관이 1984년 8월 24일 조봉구 창업자 둘째아들인 조용시씨를 장관실로 불러서 삼호그룹을 해체하고 대림에 합병한다는 결정이 됐다는 통보를 했다는 것이 조봉구 창업자의 주장이다.
이에 조흥은행을 찾아갔는데 윗선에서 위에서 만들어 놓았는데 어떻게 하겠는가라면서 위임장이라는 제목만 씌어진 백지에 서명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후대에서는 단순히 전두환 정권에 밉보여서 해체됐느냐를 두고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중동 건설 붐이 꺼져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삼호그룹은 쿠에이트 주택부가 발주한 자하라 지역 주택공사를 2억달러에 1978년 수주했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로 진출해 4억달러 규모의 알카라치 아파트 공사를 맡았다.
이에 우리 정부는 2어달러 지불 보증을 해줬다. 공사가 끝난 후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돈을 지급하는 것을 꺼리기 시작했고, 우리 정부가 지불 보증한 2억달러를 갚을 길이 막막해졌다. 이에 삼호그룹 주력사인 (주)삼호는 3억5천만달러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이후 1982년 이철희·장영자 사건이 터지면서 삼호그룹을 비롯한 국내 기업 대부분의 신용이 떨어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해외 건설 수주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삼호그룹이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게 됐다.
이에 단순히 전두환 정권에 밉보여서 그룹이 해체됐다고 보기에는 힘들다는 평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