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 엘리자베스2세 여왕의 별세가 영국정치에 뜻하지 않은 상황을 만들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 국가 중 자메이카, 바하마, 벨리즈, 앤티 바부다, 호주가 여왕 서거에 때를 맞추어 군주제 폐지와 공화정(共和政)을 요구했다. 영국 식민의 후예들이 용기를 내어 잃었던 자아회복의 청구서를 과감하게 내민 것이다. 심지어 인도는 13세기에 빼앗겨 역대 영국 왕비의 왕관을 위엄 있게 장식했던 다이아몬드“코이누르”의 반환을 요구했다. 나무가 쓰러지면 원숭이들은 흩어지기 마련이다. 뭔가 분명 변하고 있다. 그들은 오랜 기간 이 순간을 기다려 왔는지도 모른다.
닻 올린 야만의 시대
억압과 피눈물의 역사를 식민(植民)의 역사는 서술한다. 신대륙 발견 이후 미지의 땅에 대한 백인우월주의의 야만의 행진이 식민지 제국주의를 탄생시켰다. 식민지 쟁탈에 나선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등 열강들은 앞 다투어 식민지 개척에 나섰고, 아프리카인 1천만 명 이상은 백인 노예상에 팔려 대양을 건넜다. 그러나 열강의 자국민들은 자신들의 침탈행위를 환호하며 칭송했다.
영국은 19세기 초 빅토리아 여왕 때부터“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됐다. 세계영토의 1/4을 거머쥔 그녀는 대영제국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그 뒤를 이은 엘리자베스2세는 영국을 포함한 15개 영연방 왕국과 해외영토, 보호령의 여왕이 된다.
이렇듯 서구열강의 정복의 물결은 둑을 넘쳐흘러 세계의 모든 곳으로 퍼져나갔다. 서구산업혁명에 필요했던 노동력, 희귀자원과 생산품의 소비를 그들이 개척한 식민지에서 해결한다는 욕망은 제국주의의 발길을 더욱 재촉했다. 이 과정에서 제국주의라는 힘의 위세는 모든 비난을 침묵시킬 수 있었다. 생명과 인간존엄은 주장될 수 없었다. 유색인종 멸절(滅絶)의 공포가 다음 순서를 기다렸다. 살해, 납치, 살상, 강간, 고문, 거세, 인신거래, 그리고 문명의 파괴가 뒤따랐다.
왜 그랬을까? 파괴와 인간사냥의 심연에는 백인우월주의의 야수성(野獸性)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황금을 쫒는 공포스러운 야만의 시대가 닻을 올린 것이다. 이같은 시대의 비극은 문명의 산물인 총검과 대포와 폭탄과 폭격이 뒷받침했다. 폭력의 신기술인 하늘로부터의“폭격”은 이때부터 자기기만과 위선의 역사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식민지 말살의 비극을 인류양심으로 고발한 스웨덴 작가 린드크비스트(Sven Lindqvist, 1932〜2019)를“의미 있는 이 순간”에 다시 생각해 본다.
막 오른 폭격의 역사
30년 전, 그는 식민주의 팽창과정에서의 서구의 지적전통(知的傳統)이 히틀러의 대학살을 초래했다고 폭로했다. 위선에 찬 서구의 지성(知性)을 서구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통렬하게 저격한 것이다. 그의 분노는 드디어 2000년,“폭격의 역사”(A History of Bombing)라는 작품을 통해 폭발했다. 그는 유럽인들의“폭격”이 어떻게 식민지 피지배인을 무참히 학살했고, 식민지 폭격의 경험이 2차 세계대전을 거쳐 현재에 이르게 됐는가를 가차 없이 논단했다.
한국에서도 출판된 그의 작품은 폭격의 어두운 발자취를 그려냈다. 1670년, 상상속의 비행 이론가들은 폭탄이 공중에서 투하되면 가공할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알아차렸다. 1781년 프랑스의 어느 인쇄공은 공포와 전율을 느낄 수 있는 폭격비행단의 출현을 예견했다. 1784년 프랑스의 어느 형제는 열기구를 타고 25분 동안 비행했고, 백년 뒤 헤이그에 모인 강대국들은 민간인들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 공중으로부터 올 것이라고 불길한 예상을 했다.
1911년 11월 1일, 드디어 인간 최초의 폭격이 실행됐다.
이탈리아군 단엽비행기에 의지한 폭격이 무방비 상태의 아프리카 트리폴리 외각 오아시스에 가해졌다. 라이트 형제의 첫 비행 후 8년 만의 일이다. 비행기에서 몸을 굽혀 아랍인들의 머리 위에 수류탄을 던진 사람은 지울리오 카보티 중위. 2Kg짜리 네델란드제 폭탄 4발이 그의 첫 공습에 투하됐다. 25년 뒤,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 폭격에 나섰을 때, 뛰어난 조종사였던 뭇솔리니의 아들 브루노는“나무가 우거진 언덕과 들판과 마을을 불지르고, 날뛰는 동물들에게 손으로 폭탄을 던지는 일이 아주 즐겁고 재미있었다”고 했다. 5,000명의 주민은 이 생지옥에서 무참히 죽었다.
영국도 1915년 인도를 시작으로 중동 전역과 동아프리카 식민영토의 원주민에게 끊임없는 폭격을 가했다. 1925년 스페인은 반란을 일으킨 모로코 마을을 폐허로 만들기 위해 공중에서 폭격의 소나기를 퍼부었다. 잔혹한 모로코 점령방식은 훗날 프랑코 총통이 40년 동안 수행했던 식민전쟁의 모델이 됐다. 1931년 일본도 만주를 식민지화하기 위해 상해를 폭격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만들어 냈다. 이처럼 폭격은 식민지권력의 보장이라는 자신의 오랜 사명을 이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19세기를 관통하면서 식민지 절멸사상(絶滅思想)은 당연하고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 들여졌다.
학살의 성과는 더 큰 폭격을 손짓했다. 1945년 8월, 일본에 대한 B-29 폭격기의 핵폭탄 투하에 인류는 할 말을 잊었다. 오아시스 사막에 대한 폭격으로부터 히로시마, 나카사끼까지 가는 데는 불과 34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린드크비스트가 인간 야수성의 흔적을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그렇다면 헤겔이 말한 것처럼 지나간 역사는 행복의 토양이 아니라 역사의 빈 페이지였나 보다.
인도주의적이어야 할 식민지 국제법은 처음부터 국가권력의 폭력에 자신을 내다 팔았다. 오늘날 현대 분쟁지역으로 이어진 무방비 상황에서의 야만적 살상과 파괴행위는 언젠가 인류양심의 법정에 설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역사의 빈 페이지를 메꾸기 위해 린드크비스트는 자기기만에 능숙한 인간의 위선을“폭격의 역사”를 통해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던 것은 아닐까?
백병훈 약력
건국대학교 비교정치학 박사
국가연구원 원장
프라임경제신문 사장
한국정치심리공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