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덕수궁(경운궁)
[오늘 통한 과거리뷰] 덕수궁(경운궁)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9.27 13: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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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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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서울시가 정동 일대에서 주최한 ‘2022 정동야행’ 행사 기간 중 일제 강점기 일왕과 헌병, 순사 의상을 대여해주는 의복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일고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23일과 24일 양일간 테마별 가이드와 투어를 즐길 수 있는 정동스토리야행, 영국 대사관 등 ‘특별 개방 및 체험행사’, 덕수궁 석조전·돈의문 박물관 마을·경교장 ‘도슨트 투어’ 등으로 구성된 ‘2022 정동야행’이 개최됐다. ‘2022 정동야행’ 행사장 한 쪽에서는 개화기 복식과 한복을 유료로 빌려 주고 정동을 돌아보게 하는 ‘정동환복소’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옛 남여 교복이나 남성복, 경성 여성드레스, 고종황제 의상, 대한제국군 의상, 근전시대 남자한복 등 개화기 의상 등을 빌려주는데 더 나아가 일제시대 일왕과 헌병 제복까지 전시해 2만원에 빌려준 것으로 드러났다.
정동에는 조선시대 별궁이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불에 탄 경복궁을 대신해 조선의 정궁이자 대한제국 시절 황궁으로서의 역할을 한 덕수궁이 위치해 근현대사의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큰 곳이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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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월산대군 터

덕수궁은 1469년(예종 1년) 남이 장군 역모사건에 연루된 조영달의 집 터였다. 역적의 집이었기 때문에 몰수됐고, 1470년(성종1년) 송종이 이곳을 세종의 적8남 영웅대군의 부인 송씨에게 내려줬고, 1년 뒤 송씨가 이 집을 다시 왕실에 바치자 이름을 연경궁으로 짓고 왕실의 별궁으로 삼았다. 1472년(성종 3년) 의경세자 장남인 월산대군이 의경세자 제사를 맡으면서 하사를 받았다. 그러면서 연경궁으로 불리게 됐지만 이후 월산대군의 저택으로만 남았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목까지 피난갔다가 환도를 했는데 모든 궁궐이 불탔기 때문에 월산대군의 저택을 개보수하면서 임시궁궐로 사용하면서 정릉행궁이라고 부르게 됐다. 온전하게 남은 이유는 왜군이 이곳을 주둔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광해군 시절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을 내려 궁궐로 승격시켰고, 확장공사로 전각을 새로 짓게 했다. 광해군은 소성대비(인목왕후)를 이곳으로 유폐하고 서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은 잡은 인조는 경운궁 즉조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는 인목왕후가 기거했기 때문이다. 즉, 즉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인목왕후가 기거하는 경운궁에서 즉위식을 가진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다가 1897년 고종이 아관파천 후 환궁할 때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정권의 중심지가 됐다. 고종황제는 서거할 때까지 경운궁에서 지냈고,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1907년(융희 원년) 11월 순종황제는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경운궁은 고종황제가 지내는 궁궐에 지나지 않았다. 고종황제가 아관파천 이후 경운궁으로 이어한 이유는 주변에 러시아공사관, 미국공사관, 영국공사관 등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즉, 무슨 일이 발생하면 공사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을미사변 등이 발생한 것을 보면 공사관의 도움도 크게 받지는 못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애초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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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경운궁?

경운궁이 덕수궁으로 바뀌게 된 것은 순종황제가 등극하면서 태황제의 궁호를 ‘덕수(德壽)’라고 바꿨기 때문이다. 궁호에 ‘수(壽)’가 포함된 이유는 ‘선왕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함이다. 이를 두고 덕수궁이라는 명칭이 결국 퇴위한 군주가 머무는 궁궐에 붙이는 이름이기 때문에 ‘경운궁’으로 복원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특히 고종황제가 퇴위하고 순종황제가 등극한 것은 일제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덕수궁’이라는 명칭은 오히려 일제의 잔재일 수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원래 정상적인 절차라면 고종황제가 승하한 후 원래 이름인 ‘경운궁’으로 환원해야 하지만 이미 조선왕조가 망해버린 상황이기 때문에 덕수궁에서 경운궁으로 명칭을 환원할 수 없게 되면서 덕수궁이라는 명칭이 그대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한편,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이 나온 까닭은 옛날 서울가정법원이 근처에 있기 때문에 이혼을 원하는 부부들이 서울가정법원까지 함께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가 가정법원에서 나올 때는 따로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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