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액의 원고료
프레이저 청문회 참석 이후에도 박정희 정권은 각종 회유와 귀국 종용을 했다. 그러던 중 김 전 부장은 회고록을 준비하게 됐고, 중정 해외담당차장 윤일균으로부터 거액의 원고료를 받고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1979년 10월 1일 파리에 도착했고, 6일 동안 호텔에 머물다가 7일 행방불명됐다. 실종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었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2005년 5월 26일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 진실위)의 발표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 공사에 중정요원 2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동유럽 출신 협력자 2명을 10만 달러에 고용했고, 김 전 부장은 이상열 주프랑스 공사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이 공사는 전주(錢主)를 소개시켜주겠다면서 7일 샹젤리제 거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중정 요원과 협력자 2명이 이 공사의 승용차를 이용해 김 전 부장을 납치했고, 파리 근교에서 소련제 소음권총 7발을 바사해 살했다. 살해한 시신은 낙엽으로 덮어뒀다. 하지만 김 전 부장의 유족들은 이 결과를 믿지 않았고, 조사 결과도 매우 부실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것은 사용한 총기를 분실했으며, 시신을 낙엽으로 덮어뒀다는 점 때문이다. 중정요원이라는 사람들이 이처럼 어설프게 사람을 납치해서 살해를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현재 실체적 진실을 규명할 방법이 없다. 관련 증거 서류도 없을뿐더러 당시를 증언해줄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일각에서는 양계장 대형 믹서에 넣어 갈아 죽였다는 증언도 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 중론이다. 또 다른 일각에서는 김 전 부장을 납치해서 청와대로 끌고 와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직접 쏴죽였다는 설도 있다.왜 박정희와 결별했나
김 전 부장은 5.16 쿠데타 이후서부터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충성으로 일관했다. 독재정권 하에서의 중정의 어마무시한 분위기를 만든 사람이 김 전 부장이다. 김 전 부장은 대기업과 정경유착을 통해 어마어마한 액수의 불법적 통치자금을 조달했으며, 온갖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또한 조폭을 동원해서 야당을 분열시키는 정치공작을 진행했으며, 국내외를 막론하고 불법적인 도청·감시·납치·고문 등 민주화세력에 대한 야만적인 탄압을 자행하였다. 오죽하면 여당인 공화당 인사들도 남산으로 끌고 가서 온갖 폭행을 저질렀다. 김 전 부장이 중정으로 있던 시절 인민혁명당 사건,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유럽 간첩단 사건, 국민복지회 사건도 발생했는데 모두 김형욱 작품이다. 박정희 정권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경호실’ ‘보안사령부’ 그리고 ‘중앙정보부’를 이용했다. 그런데 김 전 부장이 중정 부장으로 앉으면서 경호실이나 보안사보다도 더 높은 지위에 앉게 된 것이다. 당연히 다른 세력에서 김 전 부장을 견제하게 된 것이다. 그런 가운데 3선 개헌을 반대하는 여당 국회의원 김용태를 강압적으로 끌어들여서 3선 개헌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여당 내부에서도 김 전 부장을 더 이상 중정 부장에 앉혀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이에 3선 개헌을 찬성하는 조건으로 김형욱의 경질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요구한 것이다.토사구팽
결국 3선 개헌이 성공하자 김 전 부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버림을 받기 시작했다. 1971년 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됐지만 1972년 10월 유신이 되면서 국회가 해산되자 국회의원직을 잃어버렸고,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 명단에 오르지도 못했다. 권력에서 완전히 소외가 된 것이다. 여당 내부에서도 중정 부장 시절의 악행 때문에 김 전 부장과 교류를 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소외가 됐다. 결국 1973년 미국으로 갔고, 1976년 10월 24일 워싱턴 포스트가 대한민국 정부가 로비스트 박동선을 통해 미국 관리들에게 수백만 달러를 뇌물로 제공했다는 폭로를 하는 이른바 코리아 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결국 프레이저 청문회에 참석하기에 이르렀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