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훈 칼럼] 한신의 인내
[김정훈 칼럼] 한신의 인내
  • 김정훈
  • 승인 2022.12.21 15: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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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보면 한나라 건국에 절대적인 기여를 한 한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은 이 한신에 얽힌 고사성어로 이야기를 풀어 보고자 합니다.

한신과 관련해서는 토사구팽(兎死狗烹), 표모반신(漂母飯信), 일반천금(一飯千金) 등 다른 고사성어도 많지만 오늘은 과하지욕(跨下之辱)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미 아시는 이야기이지만 한신이 동네 건달들의 바짓가랑이 밑을 기어갔다는 고사성어, 과하지욕(跨下之辱)에 대한 내용입니다. 발음하기도 쉽지 않아 기억에 잘 남지 않는 어려운 사자성어입니다. 뜻을 풀이하여 보면 사타구니 과(跨), 아래 하(下), ~의 지(之), 욕될 욕(辱)이니 가랑이 밑에서의 모욕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겠습니다.

성어의 뜻 자체만 놓고 보면 위대한 위인의 대단한 참을성을 칭송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드는데요, 사실 이 고사성어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한신의 삶, 특히 젊었던 한신의 삶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의 한신은 진나라의 패왕 항우를 제압한 불세출의 명장, 중원 통일의 전략가의 모습이라고 보기에는 한참 거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신과 관련한 사기의 회음후열전(회음 출신의 제후에 대한 열전 이라는 뜻으로 추정)을 보면 젊은 시절 한신에 대하여 가차없이 적고 있습니다. 그 중 몇가지를 옮겨보면

‘그는 젊은 시절 가난한 데다 품행이 반듯하지 못해, 유력자의 추천을 받을 수 없어 관리가 되지 못했다.’

‘천성이 게으른 편이라 장사라도 해서 먹고 살 궁리를 하기는 커녕 늘 남에게 빌붙어서 얻어먹고 다녔다.’

사기에도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젊은 시절의 한신은 고전적인 위인들의 모습은 아니었던 듯 싶습니다.

밥을 오랫동안 얻어먹어 의절하기도(혹은 당하기도) 하고, 빨래하던 여인으로 부터 여러 날 얻어 먹은 음식을 나중에 보답하겠다고 큰소리 치다가 되려 똑바로 살아라고 뼈 때리는 말도 듣고 했지요. 그럼에도 항상 거리낌 없었다는 표현을 보면 한신은 옛날 자신이 살았던 시절에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현대사회에 적합한 유연하고, 변화에 빠르고 자유로운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렇듯 어렵게 지내고 있어 주변으로부터 많은 모욕감을 받았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신은 항상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비추어 볼 때 마음 속으로는 무언가 큰 이상을 품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러한 칼을 차고 다니던 모습이 아이러니 하게도 그런 모습을 눈에 거슬려 했던 동네 건달들과 시비가 붙어서 진퇴양난에 빠지게 됩니다.

“네가 비록 키가 크고 늘 칼을 차고 다니지만 속은 겁쟁이일 뿐이다. 네가 용기가 있다면 나를 베고, 그럴 용기가 없다면 내 가랑이 밑으로 기어 나가라.”

여기서 한신은 한참을 그 건달을 쳐다보다가 가랑이 밑을 기어나가 모든 사람으로 부터 겁쟁이라는 놀림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 일화가 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로 과하지욕(跨下之辱)이라는 고사성어의 유래입니다.

누군가에 바짓가랑이 밑을 기어 간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요. 지금 글을 보시는 분들 중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 그 놈을 죽이든 내가 죽든 사생결단을 내겠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많으실 겁니다. 저도 그러한 모욕을 받았으면 눈에 뵈는 것이 없을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시정잡배와 시비가 붙어 칼을 뽑아 일을 크게 만들게 되면 어렵게 지내왔지만 마음 속으로 품었던 이상은 고사하고 본인에게 두고 두고 굴레가 되거나 최악의 경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정말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한신이 그 상황에서 초인적 인내심을 발휘한 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던 겁니다.

즉, 감정보다는 이성과 미래를 바라볼 줄 아는 혜안이 그를 인내로 이끌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이 고사성어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한신이라는 사람이 대단하다는 생각은 사실 못했습니다. 이제서야 한신이라는 인물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젊은 시절의 약간은 한심(?)했던 한신의 모습을 생각하면 점수가 약간 깍이지만요.

나중에 한신이 진나라를 제압하고 한나라를 세운 후 그 일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나를 욕(辱)보였을 때, 내 어찌 그를 죽일 수 없었겠소?

비록 내가 그를 죽인다 한들 이름을 얻을 길이 없으니,

그 치욕(恥辱)을 참음으로써 내가 공(功)을 이루어

오늘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이요."

이러한 한신의 과하지욕과 유사한 중국의 성어가 하나 있습니다. 제자백가 중 한명인 송견의 견모불욕(見侮不辱)이지요.

‘업신여김을 보더라도 치욕을 느끼지 않는다.’

한신이 자신에 대한 업신여김을 지혜와 초인적 인내심으로 이겨냈다면 송견의 견모불욕은 한신의 그것보다 더 높은 수준인 것 같습니다. 업신여김을 치욕으로 아예 느끼지 않는 경지인 것이지요. 물론 송견과 관련된 구체적인 일화는 없으니 견모불욕이 한신의 과하지욕보다는 가슴에 와닿는 정도는 다르지만 제자백가였던 대철학가로서 송견은 상당한 경지의 위인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나쁘게 말하거나 비난할 때 대부분의 우리는 그것에 대해 불쾌해하고 도전으로 받아들여 싸울 태세를 합니다. 몸에서는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기 시작하고 심장박동수는 뛰기 시작합니다. 호흡은 거칠어지고 손에서는 땀이 차오릅니다.

그런데 명상을 전공하시는 어느 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타인의 비난에 대해서 우리가 부정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이유는 그 비난 중 일부는 맞다 혹은 나와 관련이 있다는 본인의 인정이 있어서 그것이 괴로워 반발하는 것’이라고요.

저는 이 말을 듣고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만일 제가 한신의 그 상황에 있었다면 겁쟁이라는 이야기에 흥분하여 반응하였을 것 같습니다. 제 자신에게는 겁쟁이의 부분이 분명 존재하니까요. 한신은 스스로 본인은 절대 겁쟁이가 아니다라는 확신이 있어 그러한 도발에 반응하지 않고 참아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만일 송견이었다면 아예 그러한 치욕을 치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면서 타인으로부터 그것이 의도하였던 의도하지 않았던 우리는 많은 오해와 비난 속에 살아갑니다. 한신의 지혜와 초인적인 인내심 그리고 송견의 비난 자체를 모욕으로 인정하지 않는 철학적 가치관이 있으면 삶이 한결 수월해 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위대한 능력이 없는 우리로서는 어떠한 방법이 있을까요? 타인의 비난 중 자신도 인정하는 부분은 깨끗이 인정함과 동시에 향후에 그러한 부분을 없애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답이 아닐까요? 물론 타인의 비난 중 자신에게 전혀 이해와 인정이 되지 않는 부분은 송견의 주장처럼 견모불욕하면 될 것 같습니다.

올 한해 모든 분들 정말 많이 수고하셨습니다. 새해에도 여전히 수고하시겠지만 항상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김정훈 약력

공인회계사

세무사

내부감사사

IFRS Manager

現 삼지회계법인 이사

現 한국심장재단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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