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집 내각의 단발령 공표
이날 김홍집 내각 내부대신 유길준이 단발령을 공포했다. 이에 고종 황태와 태자(순종) 그리고 내각 대신들이 강제로 상투를 잘랐다. 그리고 상투보다는 단정하고 짧은 머리가 위생적이면서 일상생활에 효율이 높다고 선전하면서 전국민에게 머리카락을 자를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유교의 가르침인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受之父亲 很怕毁傷 孝之始也) : 사람의 신체와 털과 살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것을 감히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란 가르침과 정면으로 대치되면서 ‘손발을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을 자를 수 없다’면서 선비와 유생들이 반발했다. 선비와 유생들이 반발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김홍집 내각이 이른바 민비(명성왕후) 시해사건 이후 들어선 친일 내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본 낭인들이 민비를 시해하고 친일 내각을 만들면서 갑오개혁을 내걸었지만 선비와 유생들은 친일 내각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했다.김홍집 내각 무너지는 계기
선비와 유생들이 반발을 하자 김홍집 내각은 지방으로까지 관리들을 파견해서 지나가는 길마다 다짜고짜 상투를 잘랐다. 이에 사람들이 큰 길로 다니지 않게 되면서 물자가 부족해지는 사태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인플레이션 사태까지 발생했다. 결국 을미사변과 더불어 단발령까지 시행되면서 반일 감정이 극에 달했고, 의병이 일어나게 되자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이완용을 중심으로 하는 친러 내각이 등장했다.대한제국 선포 이후
아관파천을 끝내고 대한제국 선포 이후 1900년 근대화의 일환으로 2차 단발령이 시행됐다. 이때 단발령은 일본과는 무관하게 이뤄지면서 선비와 유생들도 단발령에 동참을 하게 된다. 사실 1차 단발령 때에도 선비와 유생들도 단발의 필요성은 알고 있었지만 반일 감정 때문에 단발을 거부했고, 거부 논리로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를 내세운 것 뿐이다. 이때 선비와 유생들은 나서서 ‘상투를 유지하지 않아도 효행을 준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펼쳤다. 1차 단발령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즉, 1차 단발령의 배후에 일본이 있었기 때문에 거부한 것이고, 2차 단발령은 배후가 없었기 때문에 장려를 한 것이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