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 사회에서 공경 받아야 할 교권(敎權)이 심각하게 유린당하고 있다.
열흘 전, 미국 버지니아주에서는 6살 초등학교 학생이 여성 교사를 겨냥해 권총을 쏘아 중태에 빠뜨린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한 달 전 한국에서는 중학교 남학생이 기간제 교사를 주먹으로 가격하는 믿지 못할 폭행사건이 발생했다.
며칠 전에는 학생들의 싸움을 말리려 책상을 넘어뜨리고 반성문을 찢은 교사가 학생의 부모에게 고소당해 처벌받을 위기에 처했었다. 이에 땅에 떨어진 교권을 탄식하는 1,800여명의 전국 교사들이 탄원서를 내 교사의 선처를 호소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두 달 전에는 초등학교 남학생이 체육 시간에 담임 여교사를 때리는 황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체육 수업 중 한 아이가 동급생 얼굴을 때리자 이를 본 담임교사가 말리려 했다고 교사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린 것이다.
이런 행위는 자신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폭행하는 패륜적 행위임에 틀림없다. 존경스런 대접을 받아야 할 교권이 이제 땅에 떨어져거친 세상의 경계선상에 위태롭게 서있다. 혹여 교사의 잘못이 있었다 해도 아닌 것은 아니다. 도대체 아이들의 이런 일탈행위의 원인은 무엇일까?
아마도 유력한 원인 중의 하나는 부모 탓일 것이다. 평소 학교와 교사에 대한 삐뚤어진 편견과 폄하하는 모습을 보고 자라 온 아이들이 어느 사이엔가 교사를 우습게 보는 성향을 키워 낸 것이다.
교사를 아랫사람 취급하고 함부로 대하는 부모를 본 학생들 역시 선생님을 동네 아저씨나 다니는 학원선생 대하듯 한다. 잘못된 가정교육이다. 학부모가 갑(甲)의 입장이 됐다. 특히 교육현장에서 벌어지는 젊은 엄마의 행패에 가까운 소동과 폭언, 폭력행위가 이런 비인륜적 행위의 큰 요인이다. 아이들은 어른을 흉내는 것을 자기성장으로 알고 자랑스러워하며 큰다. 결국 이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잘못된 신호를 보낸 것이다.
교권이 무너져 내리기 전, 옛날에 ‘치맛바람’이라는 것이 있었다.
끔직한 자식사랑에 선생님을 자주 찾아뵙고 준비한 봉투를 슬그머니 전하는 일종의 아부성 잘 보이기였다. 요즘에는 보기 힘든 일이 된 것 같다. 대신 그 빈자리를 차지하는 새로운 치맛바람이 등장했다.
젊은 엄마의 분노에 찬 요란한 신발소리와 함께 차갑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치맛바람이 교장실과 담임 교사실로 사전예고 없이 불어 닥친다. 항의와 공격의 이유는 자기 자식을 함부로 대했다는 것이 대부분이다. 교사로서는 억울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학교와 교사도 문제가 있다. 학부모로부터 ‘민원’을 받으면 절대로 안 된다는 패배주의와 투항주의를 스스로 먼저 자기 이데올로기로 설정하고 자기를 가두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교사는 제대로 된 설명의 기회도 얻지 못한 채 비수처럼 날아오는 독설(毒舌)을 온 몸으로 받아 안아야 했다. 이런 인격모독의 무차별 융단폭격 속에서 교사의 모멸감과 자괴감은 어떠했을까? 교사가 스스로 자괴감을 느끼게 되면 교육은 무너진다. 이런 순간에 ‘선생질’을 더하고 싶은 생각이 날까?
이처럼 이런 저런 이유들로 인해 우리사회에서 신성해야 할 교권은 참담하게 무너져 내려왔다. 공교육과 교사의 체신과 권위도 분해됐다.
2013년 ‘학생인권조례’가 공포되면서 교사의 권위와 인권은 확실하게 도전 받았다. 알게 모르게 이 조례는 교권파괴의 근원이 됐다. 문제가 있어 지탄받는 교사도 있지만 동서고금 시공을 초월하여 교사로서의 선생님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국민을 계몽하는 상록수 역할을 해야 했고, 존경과 공경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나뿐 쪽으로 변했다.
3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사회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1968년에 제정됐던 국민교육 교육장전(敎育章典) 시절에는 다양한 기념식과 스승에 대한 공경심을 표하는 각종 행사가 있었다. 아무도 이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심지어 교사에 대한 폭언과 폭행은 상상도 불가능한 시대였다. 더 늦기 전에 뭔가 대책이 절실하다.
백병훈 약력
비교정치학 박사
한국정치공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