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군부도 처음에는 반대
카미카제가 처음 일본 군부 내에 꺼내졌을 때는 ‘미치광이 계획’이라면서 비판을 가했다. 자살 공격이라는 비상식적인 수단을 동원한다는 것은 결국 전쟁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군부 내에서도 처음 제안한 사람들을 향해서 “개XX”라는 비속어까지 섞어 가면서 비난을 가했다. 처음 고안한 사람은 오나니 다키지로 중장이었다. 결국 패전 후 발복을 하면서 희생시킨 대원들에 대한 죄책감을 씻으려고 했다.기술 격차 점차 벌어지고
진주만 공격으로 인해 일본 제국은 태평양 일대의 주도권을 완벽하게 장악했다고 판단했다. 이에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진격하고 동쪽으로 계속 진출했다.그러자 미군은 다급해졌고, 이에 미드웨이 해전이 발발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항공모함’을 모두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일본 전함은 굳건히 유지되면서 1년 간 연합군과 일본 제국 간의 해상 전투는 비등하게 벌어졌다. 그러나 미군의 전투력은 계속 성장하면서 기술 격차가 점차 벌어졌다. 더욱이 일본 제국은 항공모함이 없었으니 제공권을 빼앗기게 되면서 더욱 더 불리한 형국으로 바뀌게 됐다. 처음에 카미카제를 생각하게 된 것은 전투기의 노후화이다. 왜냐하면 미드웨이 전쟁 당시 항공모함을 잃어버린 것만 아니라 전투기 정비요원을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제1항공함대가 보유한 총 정비요원 1800여명의 40%인 721명의 정비요원을 잃었다. 이는 전투기를 정비할 능력을 잃어버린 셈이다. 문제는 정비요원을 단기간에 육성할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전투기는 노후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미군의 방공능력을 뚫고 미군 전함에 폭탄을 떨어뜨리는 방식을 취한다고 해도 기체의 노후화 때문에 전투기가 그냥 미군 전함에 꽂아내려지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에 카미카제를 고안하게 된 것이다.일본 육군과 일본 해군의 충돌
여기에 당시 일본 육군과 일본 해군은 정치적 갈등을 보였다. 그러면서 상대에 대한 비난과 비판이 이어졌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한 일본 해군은 일본 육군에게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절박감이 생겼다. 왜냐하면 그나마 일본 육군은 나름 성과를 보여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 해군으로서는 카미카제를 통해 일본 육군에게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고 판단했다.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전술
하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전술이라는 평가다. 예컨대 물론 비인도적인 작전이기는 하지만 육지에서 싸우는 경우 1명의 육군이 수류탄을 품에 안고 탱크에 뛰어들면 나름 효과가 있는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카미카제 전술은 미치광이 전술이다. 왜냐하면 조종사를 육성하는데 최소한 몇 년 이상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초반에 카미카제 전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노련한 조종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카미카제 전술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되면서 그 후임을 채워야 하는데 조종사 양성 학교에서는 신참들만 넘쳐나게 된다. 즉, 간단한 조종술만 익힌 신참 조종사들이 카미카제 후임 조종사가 되는 셈이다. 당연히 성공 확률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미군 전함의 방공망은 점차 발달하면서 일본 전투기가 함대에 도착하기도 전에 속속 격추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카미카제 성공에 의해 목숨을 잃는 것보다 격추 당해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