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은 10세기부터 십자군 전쟁을 했다. 1차 십자군 전쟁 당시 예루살렘을 손에 넣으면서 많은 유럽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났다. 문제는 예루살렘이 기독교의 손에 들어왔다고 하지만 그 주변은 이교도들이 있었다. 따라서 성지순례를 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성지순례단을 보호해줘야 할 사람들이 필요했다. 이에 1119년 프랑스 귀족 위그 드 파행이 기사단을 조직했다. 초창기 9명의 기사단으로 시작했는데 수도회와 교황을 설득하면서 성전 기사단을 공식 수도회로 인준된다. 그것은 기부를 받을 수 있고, 모병을 할 수 있으며, 영지를 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1139년 인노첸시오 2세는 칙령을 내려 성전 기사단에게 세속적인 의무를 대폭 변제시켜줬다. 그러면서 성전 기사단은 세속법의 구애를 받지 않게 됐다.막대한 부 축적
이에 기사단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고, 기사단은 순례자들을 보호하면서 보호비 명목으로 이익을 얻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순례자들은 예루살렘으로 갈 때 더 이상 돈을 지참하지 않아도 됐다. 왜냐하면 순례자들은 돈을 성전 기사단에게 맡기면 예루살렘으로 가는 동안이나 예루살렘에서 성전 기사단이 기거하는 요새에서 돈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성전 기사단은 ‘보디가드’ 역할에 ‘은행’ 업무까지 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됐다. 이런 부는 한때 프랑스 남부 대부분의 지역을 차지할 정도가 됐다. 문제는 십자군전쟁이 계속 이어질수록 이슬람군의 우세로 기울어졌고, 유럽 전역에 있는 국왕들은 십자군 전쟁의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가난해졌다.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도 마찬가지였다. 십자군전쟁으로 막대한 돈이 지출되면서 가난해지자 성전기사단의 재산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필리프 4세는 성전기사단에게 막대한 돈을 빌렸기 때문에 돈을 갚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아비뇽에 유수 중이던 꼭두각시 교황 클레멘스 5세를 이용해 성전기사단에게 악마숭배, 남색 등 반기독교적 행위를 했다고 죄를 뒤집어씌웠다. 그리고 프랑스에 있는 성전기사단 단원들을 모두 잡아들였는데 그 날짜가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이었다. 그리고 그들 전부를 화형에 처했다. 그로부터 13일의 금요일이라는 유래가 생겼다는 말이 나온다. 성전기사단은 악마숭배자 단체로 몰려 강제 해산됐고, 기사단의 재산은 왕실로 몰수가 됐다. 악마가 씌웠다고 해서 화형을 시키고 재산을 몰수시키는 이런 방법은 훗날 여성에게 뒤집어 씌워서 이른바 마녀사냥을 하게 이르렀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