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10월 23일 안두희 피살 사건
[역사속 오늘리뷰] 10월 23일 안두희 피살 사건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10.23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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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96년 10월 23일 버스기사 박기사가 1949년 당시 백범 김구 암살 사건의 범인 안두희를 방망이로 때려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국부를 시해한 사람이 천수를 다하는 것을 그냥 놔둘 수 없다면서 살해를 한 것이다. 당시 박기서는 47세로 버스기사였고, 백범일지와 안두희 배후를 쫓았던 권중희 저서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를 읽은 후 살해를 결심했다고 한다. 안두희는 당시 80살 노인이었고,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서 저항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박기서가 사용한 몽둥이에는 정의봉(正義棒)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에 정의봉이 한때 유행을 했다.

장난감 권총으로 위협

이날 박기서는 안두희 집을 침입해 안두희 동거녀를 장난감 권총으로 위협했고, 안방에 감금시켰다. 그리고 안두희를 정의봉으로 때려 살해했다. 일각에서는 박기서가 안두희를 살해함으로써 백범 김구 선생의 살해 배후가 영원히 묻혔다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안두희가 죽기 직전부터 횡설수설을 하는 등 죽을 때까지 배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안두희가 김구 선생을 살해한 이후 여러 차례 감형이 됐고, 출소 이후에도 군에 복귀를 해서 장교로 예편됐고, 계속해서 잘 살았다는 점에서 의문점이 많다. 따라서 그 배후를 두고 여러 가지 추측이 나오고 있고, 가장 대표적인 ‘설’이 이승만 전 대통령 배후설이다.

고해성사 마친 후

박기서는 범행 직후 부천 삼정동 성장에 도착한 후 고해성사를 했다. 당시 이준희 신부는 박기서에게 토스트와 우유를 제공한 후 경찰에 자수하도록 했다. 이준희 신부는 검찰에서 참고인 진술을 했는데 범행 전후 박기서의 심정을 가장 잘 표현했다고 한다. 안두희 시신은 화장돼 한강에 뿌려졌다. 안두희 빈소는 조문객이 한 명도 없었고, 가족조차 없었으며, 상주도 없어서 영정도 없었다. 향도 피워지지 않았고, 조화도 없었다. 장례지도사가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는 이런 빈소는 처음 본다”고 말했을 정도이다. 박기서는 유명인이 됐다. 각계 단체 및 개인들이 박기서에게 격려금과 편지들을 보냈다. 그리고 ‘백범 암살범 안두희 처단 박기서 의사 석방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9천200명의 탄원서를 인천지법에 제출했다. 박기서는 감옥에 있었을 때 익명의 누군가로부터 매달 100만원의 생활비를 받았다고 한다. 박기서는 항소심에서 3년형 선고를 받고 상고심에서도 3년형을 확정했다. 살인죄의 법정 최저형량이 5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징역 3년형이면 선처를 한 것이다. 판결문에는 “박기서의 살인 행위는 주관적으로는 정당성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 법질서 전체 관점으로 볼 때에는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는 결국 박기서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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