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 출신 중심으로
의열단 활동은
1920년 3월 곽재기, 이성우, 신철휴, 윤세주 등을 국내로 잠입시켜,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경성일보사 등을 폭파시키려고 했지만 마지막 실행단계에서 비밀이 누설되면서 실패를 했다. 하지만 1920년 9월 14일 박재혁 의사가 부산경찰서를 폭파하고 서장을 암살했고, 12월 27일에는 최수봉 의사가 밀양경찰서를 폭파했으며, 1921년 9월에는 김익상 의사는 조선총독부 청사 폭파 의거를 성공시켰다. 1923년에는 김상옥 의사가, 24년에는 김지섭 의사가, 26년에는 나석주 의사가 일본 고관 암살, 관공서 폭파 등의 활발한 활동을 했다.소규모 테러로는 안된다 인식
그러다가 의열단은 더 이상 소규모 테러로는 안된다고 판단하고, 체계적이면서 새로운 독립운동이 필요하다고 파단했다. 이에 김원봉은 황푸군관학교에 가입하면서 의열단 세력이 크게 위축됐다. 여기에 의열단에 마르크스주의자와 아나키스트, 좌파 민족주의자 등의 인물들이 유입되면서 사상적 다툼이 크게 일어나면서 조직이 와해됐다. 결국 김원봉은 ‘조선공산당재건동맹’에 참여했고, ‘레닌주의정치학교’을 설립했으며, 1935년 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김원봉은 장개석의 지원을 받아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조선의용대는 훗날 북한 정권을 수립하는데 일조를 했고, 6.25 전쟁도 참여했다. 하지만 이후 김일성에게 숙청당하면서 남북 모두 의열단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