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11월 23일 전두환 백담사 유배 생활
[역사속 오늘리뷰] 11월 23일 전두환 백담사 유배 생활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11.23 09: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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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88년 11월 23일은 전두환의 백담사 유배 생활이 시작한 날이다. 이날부터 1990년 12월까지 약 2년간 자의반 타의반 유배생활을 햇다. 그것은 5공 청문회 등으로 인해 악화된 여론을 달래기 위해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권유를 했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전두환과 노태우 두 사람의 우정에 금을 가게 했다. 그러나 훗날 12.12 군사반란과 5.17 군사 반란 그리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법정에서 두 사람이 손을 꼭 붙잡는 장면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면서 두 사람의 앙금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87년 민주화운동 이후

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직선제를 쟁취했다. 그리고 노태우 정권이 탄생했다. 하지만 1988년 13대 총선에서 민정당은 125석을 확보, 과반에 못 미쳤다. 과반 달성이 되지 않자 노태우 정권은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고, 야당은 5공 청문회를 열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다. 노태우 정권은 결국 야당의 요구를 수용해서 5공 청문회를 열었다. 원래 전두환은 대통령에서 퇴임한 이후 상왕 노릇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노태우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의 새마을협회 비리를 캐내면서 전두환을 쳐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8년 88서울올림픽 당시 노태우는 관중 소요를 우려해서 전두환을 개막식에 초청하지 않았다. 이에 노태우가 개회식을 선언하는 것을 전두환은 연희동 자택에서 TV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1월 5공 청문회가 열리면서 전두환 내외는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인터뷰를 남기고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에 들어갔다. 이것이 자의로 이뤄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일각에서는 노태우의 권유인 것으로 알려진 바도 있다. 노태우가 당시 여론이 좋지 않으니 백담사에 몇 개월 정도 있으라고 권유했고, 전두환도 백담사에 들어갈 당시에는 몇 개월 정도 머무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2년이 됐다. 그 사이 5공 청문회가 열렸고, 노태우 정권은 전두환을 구속시키는 대신 일가친척들만 구속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하지만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그런 식으로 하면 대통령이라도 귀싸대기 맞는다”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나마 민정당이 3당 합당을 결행하면서 전두환은 백담사 유배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이 탄생하면서 1995년 말에 전두환·노태우를 전격 구속시켰다. 죄목은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등이다.

백담사 머물던 자리

전두환이 백담사에 유배생활을 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과거에는 만해 한용운 선생이 칩거하던 장소에서 전두환이 머물렀던 장소로 백담사가 유명해졌다. 이에 전두환은 자신이 머물렀던 백담사 내 화엄실에 그의 옷과 유배 당시 사진을 놓고 ‘대통령 왔다감’ 투의 문구를 걸어서 유배지를 관광지로 만들었다. 전두환은 은거생활 중에서도 행락객들을 만나 인사를 하거나 법회를 열어 강연을 하기도 햇다. 1995년 전두환이 구속되면서 부인 이순자가 다시 백담사에 갔지만 인제군 의원들은 “여기는 죄인의 은둔지가 아니다”면서 나가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2019년 12월 백담사는 전두환이 사용했던 물건들을 치우면서 이제는 전두환의 흔적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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