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준 칼럼] 4월 총선과 한국인의 정치이념
[정인준 칼럼] 4월 총선과 한국인의 정치이념
  • 정인준
  • 승인 2024.01.30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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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 2024년은 미·중 기술패권 경쟁, 우크라이나 및 가자지구 전쟁, 기후변화 등 글로벌 위기와 제4차 산업혁명에 의한 문명사적 전환에 직면하여 한국과 한국인의 위기대응 능력이 시험대에 오르는 중요한 시기이다.

현재 한국이 처한 인구감소·고령화, 저성장 및 구조조정 지연 등에 따른 ‘피크 코리아’ 위기를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는 미래의 국가경쟁력을 좌우할 AI(인공지능)가 주도하는 경제발전에 역점을 두고, 이에 필요한 법·제도 개혁을 국정과제로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올해 4월10일 예정된 총선을 “586운동권과 검사 등 법조인들의 대결“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크게 보면 6.29 선언으로 민주화를 이룩한 87년 체제 출범이후 지속돼온 보수파와 진보파간 이념전쟁의 현장이라고 하겠다.

최근 김정은 정권이 ‘적대국 2국 체제’ 선언으로 단군의 자손이라는 “민족”을 포기함에 따라 ‘비핵화, 종전선언’ 등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은 허상으로 남고, 윤석열 정부 출범이후 여·야당의 타협 없는 대치정국을 만든 국내 정치이념 지도에 변화가 올 것으로 보인다.

이번 총선에서는 국민의 힘의 ‘운동권 청산론’과 더불어민주당의 ‘정권 심판론’, 그리고 신생 중도연합 정당들의 ‘정치개혁’ 가운데 하나를 유권자들이 선택하게 된다.

이전의 대통령 선거나 총선에서 유권자들의 이념성향이 영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는바, 한국인의 사상과 이념이 변화되어온 기록을 살펴보는 것은 이번 총선에서 여론의 변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최근 방영되어 초등학생부터 노인층까지 시청하는 국민적 인기프로가 된 KBS 사극 ‘고려거란전쟁’에서 승리한 고려에서 왕의 정치이념인 덕치(德治)와 백성들의 사상의 근간은 신라시대 이래 중국과 인도에서 전래된 유교와 불교이다.

고려 중기 무신정권(1170-1270) 기간 중 왕의 권위가 추락하고 몽고의 침략에 고려가 항복한 이후 원(元)의 내정간섭이 심해지는 등 국내외 위기 상황에서 1289년 충렬왕 때 문관 안향(安珦)이 원나라에서 송(宋)나라의 주자가 정립한 성리학과 제사로 상징되는 주례(周禮)를 도입해 왕권을 안정시키고 인재를 양성했다.

1392년 개국한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채택했고 사대부와 백성들이 왕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 등 삼강오륜을 생활화하면서 조선은 유교, 성리학의 나라가 됐다.

그러나 상업과 무역이 번창하고 문화가 발전했던 개방적인 송(宋)의 성리학과 달리 조선의 성리학은 외래 사상이나 문화를 배격하는 폐쇄적인 이념인 위정척사(衛正斥邪)사상으로 변질됐다.

얼마 전 정치권에서 현직 장관을 ‘어린 놈, 건방진 놈’ 이라고 말하거나 ‘정치인이 도덕이 부족한 것은 부모의 잘못이다’ 고 말한 것은 한국인의 생활 속에 아직도 조선시대 유교 사상이 뿌리 깊게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부터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기 까지 20년 사이에 조선의 조정은 노론파의 장기 독재와 왕실 외척의 세도정치로 부패가 성행하고 재정파탄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아비규환’의 생지옥(헬 조선)이 되었는바 이 시기를 조선 말기 “잃어버린 20년”이라고 하겠다.

조선 말기 신분제 폐지 등 체제개혁 요구에 대응한 사대부와 지식층의 사상을 분류하면 동학사상, 개화사상, 위정척사사상의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천주교의 서학에 대응한 동학은 농민 중심의 평등사회를 지향한 동학혁명 실패 이후 천도교, 증산교 등 민족종교로 남아있다. 대원군과 성리학 사대부들은 위정척사사상에 의거 쇄국정책을 단행했고, 김옥균 등 개화사상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은 실패로 끝났다.

조선의 독립을 선포한 3.1 운동이 일제탄압으로 좌절된 이후 상하이, 한성(서울) 및 블라디보스토크의 임시정부가 통합돼 출범한 상하이 임시정부는 1919년 4월11일 공포된 (9월11일 시행) 헌법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정치체제를 민주공화제로 하며 임시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했다.

이념전쟁의 시작은 상하이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친미 외교노선과 국무총리 이동휘의 친소 외교노선의 갈등에서 시작됐다.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이동휘는 이승만의 ‘한국독립을 위한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을 문제 삼아 1921년 1월 대통령제 폐지 등 정부개혁안을 제안해 임시정부 전복을 시도했으나 실패 후 임정을 탈퇴했다.

임시정부 국무총리 시절 레닌의 임시정부 지원 차관을 횡령한 이동휘는 1921년 5월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을 창당했으며, 소비에트 러시아내 한인 공산당들의 분열 이후, 1925년 4월 17일 박헌영·조봉암 등이 서울에서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을 창당했다.

1945년 8월15일 전후 소련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할 것이라고 믿은 마지막 조선총독인 아베 노부유키는 일본인들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치안유지를 위해 민족지도자인 여운형에게 정치자금을 지원했다.

여운형은 8월15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하고, 건준의 140여 개 지방기구는 실질적 지방자치조직인 ’인민위원회‘로 개편됐다.

1945년 9월9일 서울에서 아베총독으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은 미군정사령관 하지중장은 공산주의 계열 조직망으로 생각한 ‘인민위원회’를 인정치 않고 군정(軍政)을 선언했으며, 좌익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9월6일 선포)은 비합법조직이 됐다. 이후 해방정국은 신탁통치 찬반 등 좌·우파 이념대립으로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조선왕조 말기 주자성리학 사상과 체제가 붕괴되면서 조선 사람들은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 나섰는데 함재봉은 ‘한국사람 만들기’에서 오늘의 한국인의 유형을 사상과 이념에 따라 친중 위정척사파, 친일 개화파, 친미 기독교파, 친소 공산주의파, 인종적 민족주의파 등 다섯 가지로 분류했다.

한국 경제발전의 초석을 마련한 박정희 대통령은 친일 개화파,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한 이승만 대통령은 친미 기독교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유교를 버리고 미국의 기독교를 받아들인 친미 기독교파가 오늘날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이끈 한국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친미 기독교파가 받아들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오늘의 한국인의 사상과 이념의 근간이 되었다.

1980년대 이전의 권위주위 정권의 독재를 반대한 야당의 지도자들은 함석헌, 정일형 등 기독교인들이었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주체사상이나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운동권이 정치에 참여하고 좌파정권을 운영하면서 좌우이념 전쟁이 심화되었다. 문재인 정권을 친중 위정척사파로 규정하는 학자도 있다.

4월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운동권 청산론’, ‘정권 심판론’과 ‘정치개혁’ 가운데 어떤 선택을 하던 선동과 허위사실에 휘둘리지 않고 국익을 위해 일할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2024년이 한국이 대의제도와 법치에 기반을 둔 안정된 민주주의국가로 발전해 나가는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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