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국엔 왜 ‘노벨상’ 없나…88세 원로 과학자, 조장희 박사의 일침
[인터뷰] 한국엔 왜 ‘노벨상’ 없나…88세 원로 과학자, 조장희 박사의 일침
  • 박영주 기자
  • 승인 2024.08.02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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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박영주 기자] “노벨상이라는 것이 사실 대단한게 아니고 ‘우리도 능력이 있는 문화민족’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것인데, 한국에서 노벨상이 나오지 않는 것은 결국 우리사회 ‘철학’의 문제다. 

우선 과학 인프라를 구축하고 세계적인 대학을 잘 키워서 오랜 전통을 바탕으로 꾸준히 맡은 바 소임을 다하다 보면 노벨상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생각한다. 미국 같은 나라는 미국 학술원이라는 모임에 5000여명의 학자들이 모여있는데 모두 노벨상을 탈 수 있는 훌륭한 학자들이다. 그 중에서 1~2명이 노벨상을 받다. 대한민국 학계에도 그런 학자들이 많아야겠다”

본지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조장희 고려대학교 석좌교수(왼쪽)와 그의 사무실 모습. /사진=박영주 기자
본지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조장희 고려대학교 석좌교수(왼쪽)와 그의 사무실 모습. /사진=박영주 기자

모처럼 만에 쾌청한 하늘이 돋보였던 지난달 31일, 고려대학교 녹색생산기술연구소의 ‘뇌과학융합센터’를 찾아 조장희 박사를 만났다. 

조장희 박사는 컴퓨터 단층촬영(CT), 자기공명단층촬영(MRI), 특히 ‘양전자방출단층촬영기(PET)’를 세계 최초로 개발해 뇌의학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권위자로 손꼽힌다. PET 독자개발 덕분에 그는 ‘노벨상에 가장 가까운 한국인’으로도 정평이 나있다.

그는 40대에 미국 컬럼비아대 정교수로 재직한데 이어 카이스트(KAIST)와 가천의과대학 석좌교수로 이름을 올리는 등 해외와 국내를 오가며 활발하게 연구를 이어왔다. 현재는 고려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올해 88세인 원로 과학자 조장희 박사는 대한민국 과학계 미래를 위한 따끔한 조언들과 함께, 인생의 교훈 역시도 아끼지 않았다. 

조 박사는 기초과학을 일으키려면 인프라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겠다며 당장의 성과가 없다고 해서 R&D 비용을 삭감하거나 ‘예산 낭비’라고 매도하는 행태로는 절대 우리나라가 선진국 반열에는 들 수 없다고 꼬집었다. 

연구하는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을 꾸준히 하면서 사는 것이 결국 행복이자, 성공의 지름길이라며 ‘바보같이 살라’는 메시지를 강조했다.

/사진=박영주 기자
/사진=박영주 기자

“정직하게 열심히 하면 운이 따라온다”
라디오 조립하던 소년, CT 원리 풀어낸 세계적 의과학자가 되기까지
스웨덴 웁살라대학-UCLA-콜롬비아 대학, 끊임없는 연구로 쌓은 ‘족적’

“사람들은 나보고 노벨상을 탈거라고들 말하는데, 사실 좋아하는 것을 정직하게 열심히 해온 것 밖에 없다. 운이 좋았던 것도 컸다. 열심히 정직하게 하다보면 웬만한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것은 전혀 지장이 없다. 현재는 양자 컴퓨터에 관심이 많아서 지금까지 연구하고 있는데, 신념을 가지고 좋아하는 것을 정직하게 열심히 오랜시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운이 따라준다고 생각한다”

자타공인의 노벨상에 가장 가까운 한국인이라고 불리는 조장희 박사지만, 정작 당사자는 이러한 세간의 평가에 손사래를 쳤다. 

초등학생 때는 라디오 조립에 정신이 팔려 있었고 피난 후 2~3년 공백을 거쳐 복학해서는 수학을 0점 받기도 했던 평범한 소년이었지만, 재미있다고 느낀 분야를 그저 열심히 정직하게 연구해왔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운이 따라주면서 지금의 성과로 이어졌다고 그는 말했다. 

조 박사는 ‘좋아하는 것을 정직하게 열심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신념만 있으면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처럼 학창시절부터 미국 콜롬비아 대학 정교수로 가기까지, 노력에 운이 더해지면서 따라온 성과들을 중점적으로 소개했다.

“중학교 1학년 때 6‧25전쟁이 터지면서 대구로 피난을 갔다. 거기서 미군부대 PX에서 나온 담배를 되팔면서 지냈는데, 서울 수복 이후에 피난학생이었던 나를 기억하고 있던 선생님 덕분에 시험을 쳐서 용두동에 있는 서울사대부속고등학교를 4학년으로 복학해 다닐 수 있게 됐다. 운이 따라줬다. 처음에는 수학 등 0점을 맞고 그러다가 1년 정도 지나니까 전체에서 중간 정도로 올라갈 수 있었다. 대학은 시험을 쳐서 서울대 통신공학과(현 전자공학과)로 들어갔다”

“서울대 공대 시절에는 우연히 등산반에 들어가서 스키를 타게 된 경험은 스키부대 창설에 힘을 보태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것도 역시 운이 따라줬다. 1958년 군복무 당시 한참 진지구축작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대대본부에서 긴급 호출을 받았다. 학창시절 대관령 스키장에서 만난 유희성 대위였다. 56년인지 57년인지 눈이 많이 와서 한국군 300명이 죽었는데, 미군보고 스키부대를 만들어달라고 했더니 스키만 300대 주고 알아서 하라고 했다더라. 이후 유 대위를 필두로 ‘스키부대’가 창설됐고 나는 유 대위와의 인연으로 선임하사가 돼 스키부대 창설에 주역이 됐다”

“군대를 갔다가 대학에 복학하고 3학년 2학기가 됐는데 그저 막막하더라. 그러나 그 후에 공부에 재미를 붙이면서 열심히 하다 보니 4학년 때는 성적이 잘 나왔고, 대학원까지 가게 됐다. 2년간 대학원에서 있다가 나왔는데 그때 당시에는 대한민국에 일자리가 많이 없었을 시절이라 우물쭈물하다가 ‘원자력 국가장학생 시험’이라는 것이 있다기에 원서를 얻으러 갔더니 벌써 시험을 치고 있더라. 시험 시작한지 15분이 지났지만 접수하는 사람이 일단 시험을 쳐보라고 했고, 그대로 합격했다. 원자력 국가장학생이 되면서 스웨덴으로 해외연수를 하러 건너갔다. 이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스웨덴 웁살라 대학교에 들어가서 보니까 문화가 달라도 너무 다르더라.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지도교수가 자기 밑에서 더 공부하려면 하라고 제안해줘서 4년간 있으면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수도권 대학에서 박사 후 과정을 하며 10여년을 지냈다. 스웨덴에서의 경험이 없었다면 한국에서 대학교 강사로 지내며 그저 그렇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운이 정말 좋았다.”

“1972년도에는 새 프로그램 때문에 미국 UCLA로 연구 부교수로 갔는데, 당시 CT(컴퓨터 단층촬영)를 엄청 새로운 거라면서 소개해주더라. 10여명의 연구원들이 모였는데 나야 물리학을 하던 사람이니까 ‘한번 해보지. 힘들 것 같지 않다’고 큰소리를 쳤고, 그렇다면 연구해보라고 하길래 CT를 수학적으로 설명해냈다.”  

“스웨덴에서 온 학생을 데리고 9월부터 시작해 12월 크리스마스 쯤 되니까 가상으로 컴퓨터 시뮬레이션 한 결과값이 나왔다. 나도 열심히 했지만 그때 스웨덴 학생이 정말로 애써줬다. 노력에 운이 더해지면서 1973년 6월에 인터내셔널 세미나를 한번 진행하자고 해서 최초로 진행했다. 이거로 유명해지면서 학교에 있으면서도 많은 돈을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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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T(컴퓨터단층촬영)의 원리를 수학적으로 설명해냈던 조장희 박사가 당시 진행한 인터내셔널 세미나의 자료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박영주 기자

“컨설팅 비용도 받고 유명세를 타면서, 그동안 연구해왔던 ‘핵물리학’를 활용할 방법이 없는지에 대해 고민하다가 나온 것이 ‘PET(양전자방출단층촬영)’였다. 지금 PET 덕분에 노벨상 관련 이야기도 나오지만, 당시 UCLA에서는 신통치 않은 반응이었다. 반면 1979년 콜롬비아 대학에서는 40대 초반인 나를 ‘정교수’로 모셔가겠다는 제안을 했다. 

“아이비리그 콜롬비아 대학은 연구환경이 가장 좋은 곳이자 노벨상 수상자도 50여명이나 배출한 학교다. 특이한 것은 한 분야에서 세계 최고 전문가가 되지 않으면 학교 내에서는 부교수에서 정교수로 올라갈 수가 없고, 다른 곳에서 최고 전문가를 초빙해오는 구조라는 것이다. 거기서 ‘PET 연구센터’ 건설을 위한 팀이 꾸려졌고 연구를 지속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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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들어온 조장희 박사는 카이스트 등의 지원을 받아 MRI 연구를 지속했다. 벽에 걸린 초창기 MRI의 모습. /사진=박영주 기자

한국으로 돌아온 세계적 물리학자 조장희 박사 
韓 카이스트-美 콜롬비아 대학, 양국 오가며 낸 연구성과

해외에서 승승장구하던 조장희 박사가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70년대 후반 무렵의 일이었다. 콜롬비아 대학 정교수로 가기 전 조장희 박사는 “한국으로 들어와 일해볼 생각은 없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이전에는 그러한 제안들에 계속해서 거절 의사를 표했지만, 미국 교수직을 유지하면서 편할 때 한국과학원(KAIST 전신)에서의 연구를 통해 한국판 CT를 만들어보자는 제의에 끌렸다. 카이스트에 절반, 미국에 절반 머무르는 생활이 그렇게 시작됐다. 

“당시 카이스트에서 10만불을 주더라. MRI가 막 시작될 때였는데, 한국 학생들이 참으로 잘하더라. 실험 결과도 잘 나왔다. 열심히 하다보니까 동아일보 1면에 나고 과학기술처에서 전화가 왔다. 초창기보다 20배 큰 MRI 연구를 60만불을 주겠다고 제의가 왔다. 서울의대에서도 전부 와서 보면서 자기네들도 하나 만들어달라고 하더라. 그때 당시 금성사(LG전자) 연구소장이었던 친구에게 얘기해서 1988년에 서울대병원에서 세계 최고의 초전도 자기공명 영상장치 가동식을 가졌다. 한국이 세계 최초로 해낸 성과였다.”

조장희 박사는 한국에 본격적으로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2005년에는 가천의대 길병원에서 최첨단 ‘뇌과학연구소’를 설립하는 과정에 참여했으며, 2015년에는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연구원에서 20억원의 연구비를 받으며 특임교수로 부임하며 연구에 힘써왔다. 

현재 고려대에서는 석좌교수 및 뇌과학융합센터장으로서 둥지를 틀고 있다. 조장희 박사는 “나는 MRI 원리를 써서 양자 컴퓨터를 만드는 연구를 하고 있다”며 “현재는 그쪽과 관련해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진=박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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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왜 ‘노벨상’ 수상자가 안 나올까?
“대학이 바로 서야 한다…R&D 예산 다 자르면 어쩌란건지”
결국 우리사회 철학의 문제…선진국 되려면 대학에 꾸준한 투자 우선 돼야

해외에서 오랜시간 활발하게 연구를 이어온 조장희 박사는 한국에서 ‘노벨상’이 나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 “결국 우리사회 철학의 문제”라고 했다. 

그는 “노벨상이 사실 대단한게 아니고 ‘우리도 능력이 있는 문화민족’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며 “한국은 늦게 시작한 만큼 계속해서 많은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되겠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노벨상이 나오기 위해 조장희 박사가 꼽은 필수적인 것은 국가의 꾸준한 투자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연구를 하려면 우선 정직해야 한다. 스스로를 속일 필요가 없다. 신념을 갖고 좋아하는 일을 정직하게 열심히 하는 것, 바보처럼 살아야 한다. 열심히 정직하게 일하면 보상을 받는다”고 조언했다. 

/사진=박영주 기자
/사진=박영주 기자

조장희 박사는 기초과학이 싹트려면 필수적인 것이 ‘인프라’라며 인프라 구축을 위해서는 R&D 예산을 아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우선 ‘대학이 바로서는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조 박사는 “대학을 키우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미국에서 대학의 등수는 결국 그 안에 좋은 교수가 얼마나 있느냐가 좌우한다”“노벨상을 배출하는 대학은 돈을 써서라도 최고의 교수를 데려다 놓고, 연구하는 이들에 대한 지원도 아끼질 않는다”고 귀띔했다.

그러면서 “당장 현 정부에서 빨리빨리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면서 R&D 비용을 깎지 않았나. 우리나라 같이 연구 역사가 짧은 나라는 대학이나 연구소에 계속적인 지원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그는 과거 자신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을 때 받은 신선한 충격을 소개하기도 했다. 

“1970년대부터 자체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서 각종 과학기술진흥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박정희 정부에서는 필요한 인재에 대해 지원을 아끼면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카이스트를 예로 들어보면, 아파트를 하나 주고 직접 와서 들여다보고 학자들한테 잘해줘야 하는데 방이 좁다고 지적하는가 하면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고 합리적인 답변을 해줬다”며 그런 모습은 기존의 독재자 이미지와는 상당히 달랐다고 조 박사는 회상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현재 대학 등록금을 동결 시킨지 15년이나 됐다. 중국 같은 신흥국가에서도 대대적인 자본을 투입해 과학기술 분야의 대학을 키우고 있고 하버드나 MIT의 경우 기금이 약 40~80조를 가지고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노벨상이라는게 사실 별게 아니다. 인프라를 잘 구축하고 세계적인 대학을 잘 키워서 오랜 전통을 바탕으로 꾸준히 연구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우리같은 사람이 대한민국 학계에 몇천명이 있어야 노벨상이 한명이라도 나오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조장희 박사는 ‘꾸준함’의 미덕을 강조하며 “바보같이 살 필요가 있다”고도 말했다. 

그는 “내가 88세인데, 경험해보니 일을 해야 건강하더라. 일을 계속하면 생체리듬이 일정해지고, 머리에 혈액순환도 잘 되면서 건강이 유지된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것을 습관화 시키면서 좀 바보같이 밑지고 살아야 한다. 당장은 손해라고 생각될지언정 시간이 지나면 다 커다란 자산으로 돌아오더라”고 말했다.

끝으로 조장희 박사는 지금의 자신을 있게 만든 소중한 기억을 전하며, 정직하게 해온 결과 행복과 성공이 따라왔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논문을 여태까지 300~400편 정도 썼는데, 처음으로 논문이 전세계적으로 인정받았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대학원 때 처음으로 논문을 썼는데 전세계 연구자들로부터 ‘논문 카피하나 보내줬으면 좋겠다’, ‘연구결과를 공유 받고 싶다’ 등의 내용으로 50여장이 넘는 카드를 받았다. 그때의 자부심과 환희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정직하게, 열심히 하면서 운이 따라주면 성공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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