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김희연 기자] 지난해 사상 최고 실적을 낸 오뚜기는 사명처럼 1969년 창립 이후 수십 년 동안 절대 쓰러지지 않고 식품 사업을 확장해 왔다.
오뚜기가 건강한 식문화를 선도하는 기업, '갓뚜기'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창업주인 함태호 명예 회장은 1930년 함경남도 원산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자제였다. 1 경기고등학교 재학 중에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피난 대신 자원 입대했는데, 자신의 안위보다 나라 사랑이 깊었던 그는 한국전쟁 임시군사교육학교인 육군종합학교를 거쳐 소위로 임관해 1957년까지 근무했다.
소령으로 군을 전역한 함태호 회장은 1959년 조흥화학에 입사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0년 동안 선친 밑에서 경영수업을 받으며 기획에서 영업, 재무 등 두루 경험을 쌓는 한편, 경영인으로서의 소양을 쌓고자 홍익대학교 상학과를 나와 1968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했다.
홀로서기를 택한 함태호 창업주
아버지가 운영하는 조흥화학 입사 10년 만에 함태호 회장은 독립을 꿈꿨다. 아버지의 뒤를 잇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길을 홀로 개척하는 것이 더욱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함태호 명예회장이 고심해 선택한 분야는 식품 사업이다.
그는 조흥화학에서 인공 감미료와 식품첨가물을 만드는 업무를 수행하면서 식품 사업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직접 식품 사업에 뛰어들어 국민의 식생활 개선에 기여하고자 하는 열망도 컸다. 결국 함태호 명예회장은 선친에게 자신의 꿈에 대한 포부를 밝히고 조흥화학을 떠나 홀로서기에 나섰다.
생소했던 카레, 첫 사업 아이템
시작은 풍림식품이었다. 마흔에 접어든 1969년 함태호 회장은 풍림상사를 설립하고, 영등포 문래동에 작은 공장까지 마련했다.
당시 카레는 흔히 먹는 음식이 아니었으며 인도에서 영국, 영국에서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도 카레가 조금씩 보급되던 시기였다.
라면은 일본업체와 기술 제휴를 통해 성공한 업체들이 이미 많이 있었다. 카레도 일본에서 인기를 끌었기에 국내에서도 밥과 함께 즐기기 좋은 음식이라 생각한 회장은 1969년 봄, 오뚜기 카레를 최초로 출시했다.
오뚜기 카레는 분말 형태라 냉장고가 없었던 시기 여름을 앞두고 보관하기도 편리했지만, 여전히 생소한 음식이었기에 전 직원이 동원돼 영업에 몰두했다고 한다. 함태호 명예회장을 포함해 직원까지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고, 과감하게 TV 광고에도 투자해 제품을 알렸다.
겨울을 대비해서 내놓은 제품은 즉석 수프였다. 쌀이 모자라 정부가 분식을 장려했던 시기, 수프 역시 빵과 함께 생소했던 음식이었기에 직원들과 시식 행사를 여는 등 홍보에 박차를 가했다.
인류 식생활 향상에 기여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든다
60년대 말~70년대 초기는 먹을 게 부족했던 터라 영양가가 높은 식품을 낮은 가격에 내놓으면 그 자체로 사회에 큰 도움이 됐다. 그래서 풍림식품은 최대한 가격은 낮게 유지하면서 제일 좋은 원료를 쓰기 시작했고, 현재 오뚜기의 경영 철학의 밑거름이 됐다.
당시 수입 상품이 대부분이었던 마요네즈도 사람들이 잘 먹지 않았던 식품이었다. 또한 국내 업체가 만든 제품들은 토마토 함유량이 0%에 달하는 등 불량 케첩이나 마요네즈가 들끓던 시절이었다. 이에 오뚜기가 카레에 이어 좋은 재료를 사용해 외국에서 기술을 배워와 투자한 최신 설비로 과감하게 국산 제품을 출시했다.
영업 사원들은 소매점마다 찾아가 제품 설명과 진열, 시식 등을 도맡아 했다. 당시 함태호 사장도 본인의 차량을 영업에 사용하라고 대주는 등 모든 일에 있어 솔선수범했다. 그는 사원들이 퇴근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가장 늦게 퇴근했다는 일화가 있으며 직원들을 가족같이 아꼈다고 한다.
창업주는 2009년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최고 경영자는 직원과 직원 가족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있다. 이제 나는 이러한 책임과 의무에서 해방되며, 이 시간 이후부터는 여러분의 책임과 의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상표를 회사명으로
1973년에는 상표에 붙여 팔던 ‘오뚜기’라는 이름으로 회사명을 바꿨다. 이렇듯 오뚜기는 카레, 수프, 케첩, 마요네즈로 수입 상품을 대체하고 대기업의 추격까지 따돌리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이후에도 후추, 식초, 참기름, 식용유, 3분 카레 등 식품 전반으로 영역을 확대하면서 꾸준히 이익을 냈다. 또한 사람들이 외식을 하기 시작하고 식당도 늘면서 오뚜기 제품들은 가정뿐만 아니라 식당에서도 업소용 상품이 힘을 발휘했다.
그 결과 1987년 청보식품을 인수하면서 오뚜기 라면이 탄생했다. 기존의 분야에서 선두 자리를 지키는 데에만 안주하지 않고, 더 큰 라면 시장에 도전한 셈이다. 당시 농심, 삼양, 팔도 등 이미 앞서나간 업체들이 많았던 상황에서 오뚜기가 진라면, 스낵면과 같은 히트 상품을 내놓은 것이다.
오뚜기는 라면 사업에 뛰어든 지 5년도 안 돼, 업계 3위 자리까지 치고 올라가 10여 년 만에 2위 자리를 위협했다. 무엇보다 4천억 정도였던 라면 시장 규모가 오뚜기가 진출하자 2013년 2조원 이상으로 커졌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일
제품과 브랜드의 명성과 달리 기업인이자 자연인으로서의 함태호 명예회장은 그림자 같은 경영인이었다. 나보다 우리, 우리보다 국가를 우선했기 때문이다.
함태호 명예 회장의 정신에 따라 전국의 오뚜기 공장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으며 오뚜기 사내 월례조회와 행사에서는 항상 애국가를 4절까지 제창한다. 애국가를 부르며 기업이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각오를 다진다는 의미이다.
함 회장은 오뚜기가 커가는 과정에서 묵묵히 크고 작은 기부도 끊임없이 펼쳐왔다. 특히 그의 삶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 심장병 어린이 후원 사업이다. 1992년 많은 수술비를 감당하지 못해 살릴 수 있는 생명이 고통받는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 한국심장재단을 통해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 후원을 시작했다.
1996년 오뚜기 재단을 설립해 장학사업을 전개해 50억 원의 장학금을 800명의 대학생에 지급하고, 2012년에는 장애인 복지법인 밀알복지재단에 후원 사업을 시작하기도 했다. 알려진 것 이외에도 그가 남모르게 사회 공헌 활동을 펼쳐나간 사례는 넘쳐난다.
또한 오뚜기는 직원을 비정규직으로 쓰지 말라는 함 명예회장의 뜻에 따라 높은 정규직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
선대 회장의 이런 선행은 함영준 회장이 뒤를 이어 지금까지 사회적 약자를 지원하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다. 함영준 회장의 딸이자 뮤지컬 배우 함연지 씨는 자신의 유튜브에 자주 출연하는 아버지 함 회장에 대해 '가족에게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아버지라고 말했다.
이처럼 행복한 가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따뜻하고 자상한 함 회장의 철학이 오뚜기만의 기업문화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존경 받는 선대 회장의 뜻에 따라 오뚜기가 앞으로도 기업가 정신을 이어 나갈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