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김희연 기자] 오랜 기간 ‘반도체 제왕’이라 불린 미국 반도체 기업 인텔이 인수 대상으로 전락했다. 글로벌 산업 트렌드가 된 인공지능(AI) 열풍에 편승하지 못한 게 결정적인 패착으로 작용한 것이다.
CPU계의 전설이었던 인텔
1968년 설립된 인텔은 미국의 데스크톱용 CPU를 중점적으로 설계하는 종합반도체사다. 사명은 흔히 지식(Intelligent)의 줄임말로 착각할 수 있지만, 통합을 뜻하는 Integrated와 전자 장치인 Electronics의 혼성어다.
인텔은 1970년대부터 50년 가까이 컴퓨터의 두뇌인 CPU 시장을 장악했다. 외계인을 괴롭혀서 제품을 개발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설립 당시만 해도 메모리 반도체에 주력하던 기업이었던 인텔은 1970년, 세계 최초로 1킬로비트 용량의 D램을 상용화하면서 장기간 시장에서 독점에 가까운 지위를 유지했다. 자연히 메모리반도체는 인텔의 핵심 사업으로 자리해 빠른 성장에 기여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일본전기, 도시바, 히타치, 미쓰비시 등 메모리 반도체 기업이 다수 등장하면서 D램 시장에서 기업 간의 치킨게임이 치열해졌다. 인텔도 그 경쟁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일본 반도체기업은 ‘10% 룰’을 앞세워 인텔을 압박했다. 무조건 인텔보다 10% 낮은 가격에 D램을 공급해 고객사를 빼앗아 오겠다는 전략이었다. 인텔이 경쟁에 대응해 반도체 가격을 낮추면 일본기업들은 인텔보다 10% 저렴한 수준으로 다시 가격을 조정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일본은 수 년만에 세계 D램시장에서 최대 80%에 이르는 점유율을 확보했고, 인텔은 결국 대규모 생산 투자로 가격 경쟁력을 끌어올리거나 사업을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1년이 넘게 이어진 경영진의 고민 끝에 인텔은 1985년 D램사업 중단을 선언했다.
선택과 집중
인텔의 CPU가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인텔은 D램 사업을 철회하고 CPU 사업에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1993년에는 펜티엄(Pentium) 프로세서가 출시됐다. 펜티엄 프로세서는 윈도우의 등장과 함께 대성공을 거뒀다. 펜티엄 프로세서 후기 모델에는 멀티미디어 성능 향상을 위한 MMX(MultiMedia eXtension) 명령어를 추가했는데, 이를 통해 인류는 본격적인 멀티미디어 시대를 접할 수 있었다. 서버나 고급 컴퓨터용, 모바일용 제품도 출시했다.
1990년대에 전 세계에 데스크탑이 보급되기 시작하고 이때 한국에도 PC방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데스크탑을 구매하게 됐다. 한국에도 인텔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컴퓨터 CPU는 인텔의 팬티엄이라는 공식이 생기게 된다.
인텔은 2005년 펜티엄 D 프로세서를 출시하며 성장이 주춤했다. 전력 소모와 발열이 심하고, 데이터 병목현상이 생겨 결국 사용자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 경쟁사 AMD가 출시한 듀얼코어 애슬론 64×2는 문제없이 작동했다.
2006년 인텔은 다시 시장을 차지하기 위해 두 가지 새로운 플랫폼인 인텔 센트리노 듀오 모바일 기술, 인텔 바이브 기술과 새로운 인텔 코어 2 듀오 프로세서를 출시했고 세계 최초의 쿼드 코어 프로세서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i시리즈의 첫 등장은 2008년이다. 당대에는 최대의 안정성을 가진 CPU로서 입지를 굳혀왔으며 AMD보다도 훨씬 정밀한 집적회로 공정으로써 AMD에 위기를 심어준 CPU의 등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코어 i시리즈 1세대 린필드가 발표되면서 인텔이 급부상하게 되고, 2세대 초 명작 샌디브릿지가 나오면서 AMD 다시금 격차를 크게 벌리게 된다.
소비자들은 인텔이 매년 세대를 거듭할 때마다 소켓을 바꿔서 매번 메인보드를 새로 사야 했지만 인텔 말고는 대체할 CPU가 없었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인텔 제품을 계속해서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AMD의 반격
AMD는 MIT 출신 박사 리사 수를 영입해서 반격을 준비했다. 결국 AMD 라이젠 3800X 이 인텔의 최고 라인업이었던 i9의 성능과 별반 차이가 없는 수준을 보였다. 이에 인텔에 반감을 품던 사람들의 많은 구매로 이어졌고, CCD 구조로 된 CPU를 출시하면서 처음으로 인텔 CPU를 성능으로 이기게 된다.
결국 인텔은 올해 강점이던 CPU 시장에서 경쟁업체인 AMD에 추월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PC 시장 침체가 이어지는 가운데 CPU의 주요 시장으로 떠오른 서버 시장에서 후발주자인 AMD가 치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10년 전인 2014년 한 자릿수였던 AMD의 서버용 CPU 점유율은 올해 23%까지 올라올 것으로 전망된다. 90%가 넘는 점유율을 가졌던 인텔은 71%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됐다. 인공지능(AI) 붐에 올라탄 그래픽처리장치(GPU) 시장에서도 엔비디아에 뒤처져 존재감을 잃었다.
여기에 인텔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스마트폰 중심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며 더욱 내리막길을 걷는 중이다. 최근 몇 년 새 급격하게 진행된 AI 중심의 시장 트렌드도 따라가지 못했다. 2017년엔 챗GPT 개발사 오픈AI의 지분을 확보할 기회도 놓쳤다. 투자금을 환수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20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퀄컴이 최근 며칠간 인텔에 인수를 타진해 왔다고 보도했다. 주로 스마트폰용 반도체를 설계하는 퀄컴은 PC용 반도체인 중앙처리장치(CPU) 제조에 특화된 인텔을 인수해 사업 지평을 대폭 확장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번 제안은 인텔이 지난 2분기 사상 최악의 실적 부진으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나왔다. 인텔은 올해 안에 전 세계 직원 11만여명 중 15% 이상을 감축하고, 올 4분기부터는 주주 배당도 중단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