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사랑의 길을 걷다, 석은옥 여사와 굿윌스토어
[인터뷰] 사랑의 길을 걷다, 석은옥 여사와 굿윌스토어
  • 김희연 기자
  • 승인 2024.10.24 16: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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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강영우 박사의 동반자, 석은옥 여사가 들려준 ‘굿윌’ 이야기
쓰지 않는 물건, 입지 않는 옷이 장애인의 일자리가 돼주는 굿윌스토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화합하는 착한 소비

#굿윌스토어를 아시나요

/사진=김희연 기자
굿윌스토어 밀알우리금융점./사진=김희연 기자

[파이낸셜리뷰=김희연 기자] “어서 오세요. 오늘 빨간색 택이 50% 세일입니다.”

식품부터 옷가지, 각종 잡화, 서적에 이르기까지. 보기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이곳은 우리은행 본점에 자리한 굿윌스토어다. 

복지재단에서 운영하는 굿윌스토어는 개인이나 기업으로부터 다양한 생활용품을 기증받아 저렴하게 판매한다.

굿윌스토어 밀알우리금융점./사진=김희연 기자

굿윌스토어가 더 특별한 이유는 단순 중고 물품을 판매하는 매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국 모든 스토어에 장애인을 고용해 이들이 보람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오래된 매장엔 장애인 직원이 10년 이상 장기근속하고 있기도 하다.

굿윌은 1902년 미국 감리교 목사가 시작한 운동으로, 보스턴의 이민자와 가난한 이들에게 기증물품을 수선해 저렴하게 판매하는 일자리를 제공했다. 지금 전 세계에는 미국과 캐나다를 포함해 12개국에 3400여개의 매장이 있다.

미국에서 시작된 굿윌이 오늘날 우리나라에도 전파되기까지, 고 강영우 박사와 그의 아내 석은옥 여사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평소에도 남을 돕는 삶을 실천해 왔던 석은옥 여사(1942)가 고 강영우 박사(1944)와 함께 어떤 삶을 펼쳐졌는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강영우라는 소년을 만난 이야기

“누나, 나와 결혼해 주세요.”

1968년 스물다섯 꽃다운 나이, 귀한 집 외동딸로 태어나 명문사학을 졸업하고 앞날이 창창한 그녀가 대뜸 맹인에게 청혼을 받았다. 

둘의 사랑이야기는 석은옥 여사가 대학시절 걸스카우트 활동으로 맹인 소년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그녀가 만난 소년 시절의 강영우 박사는 겉보기엔 전혀 시력을 잃은 사람 같지 않았다고 한다. 

중학생 때 축구공을 맞아 시력을 잃고 부모와 누나마저 잃어 고아가 됐지만, 보이지 않는 눈엔 누구보다 빛나는 비전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그 맹인 소년만이 볼 수 있는 세상의 빛이었다. 

석은옥 여사./사진=김희연 기자
석은옥 여사./사진=김희연 기자

“제 본명은 석경숙입니다. 석은옥이라는 이름은 학생 강영우가 프러포즈 할 때 지어준 이름이에요.”

돌 석(石), 은 은(銀), 옥 옥(玉). 돌로 10년, 돌보다 나은 은으로 10년, 은보다 귀한 옥으로 10년을 함께하자는 뜻이다. 예고 없는 그의 청혼에 당황했음에도 석은옥 여사가 남은 평생 강영우 박사의 환한 눈과 지팡이가 되어주기로 한 순간이었다. 

1972년, 석은옥 여사는 학생 강영우와 결혼 후 그의 유학길에 동행해 낯선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학구열이 남달랐던 강영우 박사는 미국에서 3년 7개월을 공부한 끝에 대한민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 타이틀을 얻었다. 

이후 일리노이 대학교수와 주 특수교육국장을 역임하고 아들 부시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 백악관에 입성했다. 아메리칸드림을 이뤄낸 것이다. 2012년 그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누렸던 영광스러운 삶 뒤에는 석은옥 여사의 아낌없는 헌신이 있었다. 

#석은옥 여사의 ‘해피라이프’

해피라이프./사진=김희연 기자
해피라이프./사진=김희연 기자

석은옥 여사는 시각장애인 아내의 역할에서 나아가 따뜻한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충실한 삶을 일궈왔다. 미국 최고의 안과의사와 백악관 법률고문으로 키워낸 두 아들의 어머니이자, 두 며느리의 멘토 같은 시어머니이며, 손주들의 난로와도 같은 할머니이다.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일의 크기와 관계없이 나를 항상 기쁘게 해줘요.”

또한 미국 초창기 이민 세대의 커리어우먼으로서의 입지도 굳게 다졌다. 인디애나주에서 28년간 시각장애인 교사로 활동하며 보이지 않는 이들의 감각을 깨워줬으며, 은퇴 후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 여성들의 삶을 돕는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임 회장을 맡아 운영하기도 했다. 

현재도 ‘강영우 장학재단’ 이사장을 맡으며 수많은 시각장애인을 지원하고 있다. 그녀가 70세 때 쓴 저서 ‘해피라이프’에는 살면서 느낀 ‘희망’, ‘기쁨’, ‘사랑’에 관한 이 모든 이야기가 담겨있다. 

#한국에 닿은 굿윌 운동

석은옥 여사./사진=김희연 기자
석은옥 여사./사진=김희연 기자

“굿윌스토어는 자신이 기증하고 구입한 물건들로 누군가의 자립을 도울 수 있는 곳입니다. 더 많은 장애인들이 꿈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강영우 박사와 석은옥 여사는 극히 제한적인 삶을 살았음에도 국경을 넘나들어 장애인들의 벽을 허물고자 했다.

대표적인 활동 중 하나가 굿윌이다. 강영우 박사는 살아생전에 인터내셔널 굿윌 보드멤버로 활동하며 한국에도 굿윌 운동을 전파하고 싶어 했다.

두 부부의 도움이 이어져 2003년 부산 호산나교회에서 자그마한 첫 스토어가 생긴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에 서울과 수원을 포함해 3개의 스토어가 운영됐다.

매장을 잔잔하게 이어오던 중 남서울은혜교회의 원로목사인 밀일복지재단 홍정길 이사장이 2011년 밀알복지재단에 지점을 만들면서 본격적인 부흥이 시작됐다. 굿윌스토어 확산으로 장애인들에게 더 많은 안정적인 일자리가 생긴 것이다.

“강영우 박사는 굿윌스토어를 한국에 가져와서 수익형 모델로 만들어 발달장애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자고 했어요. 그렇게 밀알복지재단에서 2011년 5월 송파점을 기점으로 굿윌스토어를 확대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선이 아닌 기회를 모토로

그 결과 밀알복지재단, 함께하는재단, 중앙복지재단 등 총 5개의 후원사가 운영하는 굿윌스토어는 장애인과 일자리를 갖기 어려운 취약 계층에게 일자리 기회와 여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는 굿윌스토어 직원 출신인 유영균 상임대표가 전체적인 운영을 맡고 있다. 전국 51개의 굿윌스토어 지점에서 600여 명의 장애인이 기증접수, 기증센터, 기증품 수거, 물류 기증품 상품화, 영업 등 다양한 파트에서 일하는 중이다.

석은옥 여사는 현재 많은 기업들도 장애인을 돕는 일에 동참해서 매장을 늘리는 일에 협조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사진=우리금융미래재단

우리은행 등 우리금융미래재단은 발달장애인 자립지원을 위해 밀알복지재단과 10년간 굿윌스토어 100호점을 만드는 업무협약을 맺었다. 지난 4월 밀알우리금융점을 개점한데 이어 올해 안에 6개를 오픈할 예정이다.

1000원에 판매하는 햇반./사진=김희연 기자
1000원에 판매하는 햇반./사진=김희연 기자

CJ제일제당도 굿윌스토어와 오랜 인연을 맺어왔다. 국내 식품업계 최초로 굿윌스토어에 식품 기부를 시작했고, 굿윌스토어와 손잡은 기업 중 가장 많은 물량을 기증해 매월 발달장애인 280여 명의 일자리를 책임지고 있다. 

석은옥 여사는 “누군가에겐 직업을 갖는다는 것이 그저 꿈같은 이야기일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행한 작은 기부가 자립이 필요한 장애인들의 일자리가 되는 현장인 굿윌스토어를 방문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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