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2001년 3월 21일은 현대그룹 초대 회장이면서 이병철 삼성그룹 초대 회장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적인 1세대 기업인인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사망한 날이다.
생전에는 대한민국 최고 부자로 불리웠고, 왕회장이라는 별칭을 가진 인물이었다. 왕회장으로 불린 이유 중 하나는 현대그룹의 하청회사로 시작해 중견기업이 된 회사들이 많아서 회장들에게는 왕회장으로 불리었다.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와 함께 고도 경제성장을 함께한 인물로 자수성가한 인물이기도 하다. 삼성의 이씨 일가는 이미 부를 가졌기 때문에 이병철 회장이 정주영 회장보다는 인기가 덜했다.
또한 검소한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루는 정주영 회장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돈 될 만한 물건이 없어서 도둑이 “에이~ 무슨 왕회장 집이 이래?”라면서 그냥 가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면 송전리 아산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 사이에서 6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고향 마을 아산리의 이름을 따서 호를 ‘아산’이라고 했고, 곳곳에 ‘아산’이라는 이름이 들어갔다. 하지만 충청남도 아산(牙山)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지금의 초등학교인 송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젊은 시절 부친이 소를 판돈 70원을 팔아서 서울에서 경리 공부를 하다가 도로 끌려서 고향에 돌아와야 했다.
이후 다시 가출해서 인천 부둣가에서 막노동으로 돈을 벌어 서울에 정착했다. 온갖 잡일을 하다가 신당동 쌀가게 ‘복흥상회’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쌀가게 주인이 노름에 빠진 외아들에게 실망해서 정 회장에게 가게를 매도했고, ‘경일상회’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일제가 쌀 배급제를 실시하면서 가게 문들 닫아야 했다.
이후 ‘아도 서비스’(ART SERVICE)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세워 직원이 80명에 달할 정도로 크게 운영했다.
이후 아도 서비스에 불이 나서 차들이 모두 타버렸지만 정 회장은 차주인에게 찻값을 모두 변상하겠다면서 설득에 나섰고, 당시 화신백화점 박흥식 회장이 화신백화점 자동차를 모두 ‘아도 서비스’에 맡기게 되면서 재기했다.
해방 이후
해방이 되고 1947년 서울에 ‘현대토건사’를 차렸다. 당시 은행에서 큰 돈을 빌리는 사람들을 봤더니 건설업자가 많은 것을 보고 자동차 수리공장 사장이 건설사를 세운 것이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주한미군 통역장교로 복무한 동생 정인영 회장의 도움을 받아 주한미군 관련 공사를 싹쓸이 하면서 창립 10년 만에 전국 10대 건설사로 성장한다.
당시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드와이트 D.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겨울에 방문을 했는데 UN묘지에 잔디를 입히는 것을 의뢰받았다. 당시 한국 여건상 겨울에 잔디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업체들은 전부 거절했지만 정 회장이 이를 받아들였고, 밭에 있는 보리밭을 구입해서 UN묘지에 깔았다. 이 일이 화제가 되면서 미군으로부터 많은 일을 수주 받았다.
하지만 고령교 공사가 계속 실패를 거듭하면서 막대한 사채를 끌어다 써야 했고, 1955년 완공을 했지만 동생 정순영 20평짜리 기와집, 매제 김영주 20평짜리 집, 옛 자동차 수리공장까지 팔아야 했다.
조선소 건립
그렇게 현대건설은 중견기업으로 거듭나면서 1971년 정 회장은 미포만 해변 사진과 축적 지도,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걸계로를 들고 차관을 받기 위해 유럽으로 돌았는데 그 이유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정 회장에게 조선소를 건립하라고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정 회장은 영구에서 바클리스 은행과 4천300만 달러 차관 도입을 협의했지만 은행의 최종 입장은 거절이었다.
이에 정 회장은 1971년 9월 바클리스 은행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선박 컨설턴트 회사의 롱바텀 회장에게 추천서를 써달라고 부탁을 했다. 정 회장은 롬바텀 회장에게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줬는데 그 지폐에는 거북선이 그려져 있었다.
정 회장은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앞서 철갑선을 만들었다”면서 설득을 했고, 결국 추천서를 받아냈다.
하지만 바클리스 은행은 배를 구매하겠다는 사람을 먼저 찾아오라고 요구했고, 정 회장은 롱바텀 회장에게 그리스 선박왕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의 처남인 리바노스가 값싼 배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26만톤짜리 선박 수주계약을 따낸다. 정 회장은 그를 ‘나보다도 미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조선소도 없는 사람에게 배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이에 정 회장은 1972년 울산 조선소 건설에 들어갔다. 그리고 울산 조선소는 현재 우리나라 경제 성장의 상징이 됐다.
서산간척지 공사 등시는 뻘지형으로 인해 매립이 잘 안되자 큰 폐유조선 두척을 착저 시켜 둑을 만들었고, 매립공사를 한 후 폐선을 분해해 판매했다.
이같은 공법은 나중에 조수간만으로 인한 방조제 공사나 홍수로 인한 긴급 제방을 만들 때도 유용하게 활용됐다.
중동 개발 붐
오일쇼크로 인해 중동에 엄청난 돈이 몰리면서 중동 시장이 열렸다. 이에 현대건설은 다른 나라 건설사들이 100만달러로 입찰을 한다면 절반도 안되는 40만달러를 적어내면서 많은 공사를 맡았다. 이것이 이른바 오일머니로 대한민국 경제를 크게 도약 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동을 다녀온 아버지들의 주머니가 넉넉해지면서 1980년대 가정집에 부가 축적이 되기 시작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 일등 공신으로 경쟁도시 일본 나고야 올림픽 유치위원회가 비싼 시계를 IOC 위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면서 홍보를 하자 정 회장은 IOC 위원들에게 꽃바구니만 돌렸다. IOC 위원들은 시계보다는 오히려 꽃바구니에 대해 관심을 보이면서 결국 최종 투표에서 서울이 나고야를 누르고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갑작스런 정계진출
1987년 명예회장으로 은퇴를 했다. 그런데 노태우 정부 말기 갑자기 역대 정권에 바친 비자금이 공개되면서 정 회장은 기업을 하면서 정부에 갖다 바친 돈으로 차라리 정치를 하자는 생각을 갖게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통일국민당을 조직하고 이주일을 영입하는 등 노력 끝에 창당 한달만에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31석을 얻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했고, 본인도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현대그룹 임직원과 가족을 노골적으로 동원했다면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통일국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지만 금전 정치의 한계를 보였다.
개표 직후 정 회장은 “당원이 1,200만명인데 득표수가 400만표(정확히는 388만표 정도)라니 우리 당원들은 다 어디에 투표한 것인가”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하지만 현대그룹은 침체기에 빠졌다. 그리고 1998년 6월 16일 판문점을 통해 ‘통일소’로 불리는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후 여러 번 더 방북하며 호화 유람선 금강, 봉래호를 이용한 금강산 관광을 성사시켜 11월 18일 첫 출항했다.
1999년에는 현대건설이 평양에서 체육관 건설 기공식을 가졌고 정주영 사후인 2003년에 완공한 뒤 류경정주영체육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이후 2000년 5월 건강을 이유로 명예회장직을 사퇴했다.
그 이후 죽는 순간까지 편안하지 못했다. 현대판 왕자의 난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정 회장은 자식들간의 불화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화해를 시키지 못했고, 2001년 3월 21일 폐렴으로 인한 급성호흡부전증으로 사망했다. 이때가 향년 85세이다. 그리고 현대가는 현대, 현대백화점,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으로 사분화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