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4월 1일 포항종합제철 주식회사(현 포스코) 창립일
[역사속 오늘리뷰] 4월 1일 포항종합제철 주식회사(현 포스코) 창립일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4.01 0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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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종합제철 주식회사 창립식장./사진=포스코
포항종합제철 주식회사 창립식장./사진=포스코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68년 4월 1일은 현 포스코인 포항제철 창립일이다. 박정희 정권은 제2차 경제개발계획 기간(1967년~1971년)에 철강공업 육성계회을 세우게 된다. 이에 1963년 5개국 8개사 연합체인 대한국제제철차관단이 결성되고, 1968년까지 예비협정, 기본협정, 추가협정의 세 차례에 걸쳐 협상이 이뤄지게 된다.
이 과정이 진행되면서 1967년 7월 포항에 제철소를 세우기로 하고, 같은해 9월 대한중석이 종합제철사업의 주체로 선정됐다.

자본금 4억원으로 설립

이에 1968년 4월 1일 대한중석을 모태로 포항제철이 창립되는데 대한민국 정부가 3억원(75%), 대한중석이 1억원(25%)을 출자하면서 자본금 4억원에 포항종합제철 주식회사 국영기업으로 창립된다. 박태준 전 국무총리는 일본어가 능통했기 때문에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특사로 파견이 됐었고, 임무를 마치면서 대한중석 사장에 임명됐다. 여기서 경영의 실제를 배우면서 만성적자와 부패 온상이었던 기업을 흑자로 돌려놓으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눈에 들었다. 그리고 포항제철 사장에 임명된 것이다. 창립식은 서울 명동 유네스코 회관에서 개최됐는데 창업 인력은 39명이었다. 대한국제제철차관단이 그해 자금 지원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해가 다가도록 자금 지원이 이뤄지지 않았다.

대일청구권자금으로 제철소 건립

세계은행의 한국 담당자는 포철이 경제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박태준 전 총리는 1969년 1월 대한국제제철차관단의 모기업인 코퍼스의 포이 회장을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고, 포이 회장에게 우리나라의 상황과 제철소의 필요성을 이야기했지만 포이 회장은 거절했고, 대한국제제철차관단에서 결국 자금 지원이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박태준 전 총리는 포철 건설 자금을 동원할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것은 대일 청구권 자금이었다. 당시 8천만 달러 정도의 대일 청구권 자금이 남아있었고, 일본은 자금을 제공하면서 돈의 용처를 명시해뒀으나 그것을 바꿀 수 있다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었다. 박태준 전 총리가 일본 정부와 합의를 하면서 자금을 제철소 설립에 쓰일 수 있게 했다. 일본은 자신들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일본 내에서도 제철소 환경 문제가 제기되면서 포철에 대일청구권자금이 들어가는 것을 허용한 것이다.

자금은 마련됐지만

자금은 마련됐지만 제철소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술이 필요했다. 이에 포철은 신일본제철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신일본제철 기술자들은 가급적 전수를 제대로 해주지 않으려고 했다. 이에 박태준 전 총리는 제철소 기술자 몇 명을 데리고 공장 안을 산책하듯이 천천히 걸으면서 모든 것을 머릿속으로 기억해냈다. 왜냐하면 당시 신일본제철 기술자들이 사진을 찍거나 메모를 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에 기술자들은 공장안을 둘러보면서 머릿속으로 기억해냈고, 그것을 실현해냈다. 그러자 일본 철강업계와 정계는 신일본제철이 너무 많은 것을 알려줬다고 불만을 토로했고, 와야타 제철 이나야마 회장은 “많은 것을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워낙 잘한 것”이라고 말했다. 마침내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1호기 공사가 시작됐는데 박태준 전 총리는 포철 직원들에게 “식민지 배상금은 조상의 피의 대가이므로, 제철소가 실패하면 오른쪽으로 돌아 나아가 영일만에 빠져 죽자”고 말했다. 그리고 1973년 6월 9일 마침내 용광로에서 첫 쇳물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포항제철은 박정희 정권의 상징이 됐고, 오늘날 세계적인 철강회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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