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896년 4월 6일은 근대올림픽 개회식이 개최된 날이다. 393년을 마지막으로 고대올림픽이 끝났는데 프랑스 역사학자인 쿠베르탱이 주관한 올림픽이 열린 것이다.
이후 4년마다 나라마다 돌아가면서 개최지를 변경하는 올림픽이 열렸고, 오늘날에는 국제적으로 가장 큰 스포츠 행사 중 하나가 됐다.
그리고 ‘돈’이 붙으면서 올림픽은 막대한 돈이 오가는 스포츠 행사가 됐다. 일각에서는 돈이 투입되면서 과거의 의미가 많이 퇴색됐다는 비판도 받았다.
올림픽 개최 이전에는
19세기 들어오면서 유럽 전역에서 소규모 스포츠 행사가 열렸다. 1870년 파나티네코 경기장에서 열린 올림픽의 경우 3만명의 관중이 몰렸다.
이 상황 속에서 윌리엄 페니 브룩스 박사는 전세계의 국가가 여러 스포츠 경기를 하는 무엇인가를 만들자고 제안했고 쿠베르탱 남작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쿠베르탱 남작은 1894년 6월 18일 11개국 스포츠 협회 대표들을 파리에 있는 소르본에 모여 그의 계획을 알렸고, 의회를 구성했다.
의회에서 첫 번째 근대올림픽 개최지와 일정을 정해야 했다. 쿠베르탱 남작은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박람회에 맞춰 1900년에 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6년 후에 열리는 것이기 때문에 대중의 관심이 낮아질 우려가 있다면서 1896년 올림픽을 여는 것을 의회 회원들이 제안했고, 승인됐다.
일정이 정해지면서 개최지를 정해야 하는데 몇몇 대표단은 런던을 개최지로 제안했지만 쿠베르탱 남작이 거절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고대올림픽의 발상지인 그리스 아테네가 상정됐고,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또한 후에 비켈라스는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쉽지 않은 아테네 올림픽 개최
근대올림픽이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다는 소식은 그리스 안팎에서는 엄청난 소식이었다. 물론 그리스 왕실도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이에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한다,
다만 그리스는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으면서 총리가 여러번 교체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여기에 개최 비용이 쿠베르탱 남작이 예상했던 것보다 3배 이상 높게 나타나면서 올림픽조직위원들이 사임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리스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모금을 하기 시작했고, 특별우표까지 발행하면서 자금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올림픽이 개최됐다.
개회식 당일
1896년 4월 6일로 결정한 것은 서방교회와 동방 정교회 모두 부활절 다음 월요일이었으며 그리스 독립 전쟁의 기념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당일 파나티네코 경기장에는 요르요스 1세와 그의 가족들을 포함한 약 8만명의 관객이 관람했다.
조직위원회 위원장인 콘스탄티노스 황태자의 연설이 끝난 후에 그의 아버지인 요르요스 1세가 제1회 근대 올림픽의 개최를 선언했다.
개최 선언이 끝난 후 스피리돈 사마라스가 작곡하고 코스티스 팔라마스가 가사를 지은 올림픽 찬가를 9개의 악대와 150명의 합창단이 연주했다. 성화 릴레이, 선수 대표 선서는 하지 않았다.
성공적인 개최
이날 1회 올림픽은 이렇게 성공적으로 개최됐다. 개최국인 그리스는 마라톤 경기에서 자국 선수인 스피리돈 루이스가 승리의 영광을 차지하면서 무사히 올림픽을 마칠 수 있었다.
대회가 끝난 후 IOC는 올림픽을 계속 그리스에서 개최할 것인가를 두고 갈등을 보였지만 1900년 대회는 파리만국박람회와 연결해서 파리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올림픽은 나라마다 순환하면서 개최하는 것이 관례가 됐다.
1970년대까지 IOC는 적은 예산으로 운영했다. 또한 어떤 상업적 관심도 올림픽과 연계를 꾀하는 것을 거부했다. 협력 스폰서의 관심이 IOC의 결정에 지나치게 간섭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72년 에이버리 브런디지 위원장이 사임한 후 IOC는 텔레비전 중계권을 판매하고 스폰서와 계약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차 IOC 금고에는 돈이 쌓이기 시작했다. 1984년 LA올림픽에서는 2억 2천500만달러라는 이익을 얻었다. 독점스폰서에 대한 권리를 판매했고, 그로 인한 이익을 창출했기 때문이다.
그 같은 일이 가능해진 것은 텔레비전이 발명됐고, 전세계인이 텔레비전을 통해 올림픽을 시청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개최국은 더욱 많은 자본을 올림픽을 치르기 위해 투입돼야 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만 해도 올림픽은 제국주의를 홍보하는 수단이 됐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등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소 냉전 속에서 체제 경쟁의 수단이 됐다. 그리고 1966년 도쿄올림픽은 패망한 일본이 다시 일어섰다는 것을 전세계에 알리는 올림픽이 됐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미소 냉전이 무너지면서 자본주의 국가들과 공산주의 국가들이 하나로 화합하는 그런 올림픽이었다. 실제로 서울올림픽 개최 후 몇 년이 지난 시점에서 소련이 붕괴됐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개최국이 올림픽에 쏟아붓는 돈이 많아진 반면 더 이상 체제 경쟁이 무의미해지면서 굳이 올림픽을 개최해도 되냐는 여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IOC는 독점 중계권과 독점 스폰서 등을 통해 배를 불리고 있지만 개최국은 적자만 나오는 이런 상황 속에서 더 이상 올림픽 개최는 무의미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세계는 올림픽에 열광을 하고, 메달을 딴 선수들에게 아낌 없는 박수를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