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러시아에서 통조림 캔에 혀가 낀 북극곰이 사람에게 도움을 받은 소식이 들려왔다.
21일(현지시간) 호주 ABC뉴스 등 외신에 따르면 러시아 북부 크라스노야르스크주 딕손 마을의 한 주택 마당에서 야생 북극곰이 발견됐다.
해당 북극곰은 입에 통조림 캔이 끼워져 있었고, 사람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전했다. 하지만 해당 남성은 자신의 힘으로는 통조림 캔을 빼낼 수 없다고 판단해서 러시아 천영자원감독청에 연락했다.
이에 모스크바 동물원의 수의사들이 도착했고 캔을 제거하고 찢어진 혀를 봉합하는 수술을 진행했다.
야생 북극곰이 사람에게 접근을 하지 않는 습성이 있는데 해당 북극곰은 통조림 캔으로 인해 자신이 굶어죽을 수 있다고 판단해서 사람에게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기후변화로 굶주린 북극곰이 먹이를 찾아 민간을 찾는 일이 잦아지고, 쓰레기를 뒤지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나폴레옹이 전쟁 위해 고안한 제품
프랑스 나폴레옹은 전쟁 중에 야전용 음식 보존을 고민하게 됐다. 이에 야전용 음식 보존법을 공모했고, 제과기술자인 니콜라 아페르가 유리병에 조림을 한 음식을 담는 방법을 고안하면서 이른바 ‘병조림’이 탄생했다.
하지만 유리이기 때문에 잘깨지고, 운송 중 뚜껑이 쉽께 빠지는 단점이 잇었다. 이에 적국이었던 1810년 영국에서 피터 듀란드가 석관제조법을 개발하면서 유리병에서 깡통으로 대체했고 통조림이 만들어졌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를 했는데 패배한 이유가 프랑스군은 병조림을 이용해서 보급을 했고, 영국은 통조림을 이용해서 보급을 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즉, 병조림은 쉽게 깨지고 부패가 진행되는 반면 통조림은 쉽게 깨지지 않고 가볍기 때문에 보급이 원활하게 이뤄지면서 영국군을 비롯한 동맹군들의 사기가 높아지면서 승리를 했다는 것이다.
초창기 통조림은 따개가 없어
초창기 통조림은 따개가 없었다. 아울러 현재의 통조림보다 무거웠다. 그러다보니 통조림 제조사는 겉포장지에 ‘끌과 망치로 모서리를 쳐서 먹어라’고 소비자에게 알렸다.
이에 소비자들은 칼로 쑤시거나 망치와 못으로 통조림 뚜껑을 쳐서 먹었어야 했고, 주요 소비자인 군인들은 주로 전선 등에서 총검으로 따서 먹었었다.
1858년 남북전쟁 당시 미국은 결국 통조림 따개를 발명했다. ㄱ자로 꺾인 손잡이를 1자로 펴서 위로 살짝 들어 올리고 통조림을 테이블 위에 놓아서 막대 가까이 붙이고 강하게 내려 찍은 다음 다시 ㄱ자로 손잡이를 접은 다음 누르면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빙빙 돌리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손을 다치는 사고 등이 빈번해지면서 아이들은 통조림에서의 접근성이 용이하지 않았다.
원터치캔 등장
그러다가 1960년 따개가 필요 없는 원터치 캔이 등장했다. 원터치 캔의 등장은 통조림 산업에 새로운 획기적인 전환을 이뤄냈다. 남녀노소 누구나 통조림을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통조림의 보존기간이 사실상 거의 영구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70년 지난 통조림 캔을 따서 먹은 사례가 있었는데 멀쩡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이런 이유로 지구 멸망의 날을 기다리는 생존주의자들이 지하실을 만들어 놓고 통조림을 보관한다. 다만 과일 통조림은 10년 이상 넘어가면 과당이 탄소로 분해되기 때문에 먹지 말아야 한다.
남북 체제 경쟁의 상징으로도
우리나라에 통조림이 보급된 것은 한국전쟁 때 미군을 통해 알려지게 됐다. 다만 통조림이 고급 식품에 속했기 때문에 하층민보다는 중산층의 기호식품이었다. 더군다나 따개가 있어야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하층민의 접근성은 용이하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은 미군을 통해 통조림을 접할 수 있었는데 당시 김치도 통조림에 담아서 제공을 했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했던 우리나라로서는 직접 김치 통조림을 만들자고 생각했고, 국내 제조사가 제조를 했다.
하지만 초창기 제품에서는 녹물이 나와서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에 김치 통조림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고, 1968년 1월부터 베트남의 한국군에 국산 김치 통조림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서도 통조림 산업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됐다.
북한에서도 국산 통조림이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이와 관련해서 임수경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일화가 있다. 대학생 시절 평양을 방문한 이른바 ‘임수경 방북 사건’ 이후 우리나라로 돌아와 체포가 됐다.
1990년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리면서 북한 기자방문단은 임수경과 가족들이 무사하다는 것을 직접 확인해야겠다면서 임수경의 집을 방문했다. 당초 목적은 임수경의 방북으로 인해 우리 정부로부터 갖은 고초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북한 주민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고, 생중계를 했다.
그런데 임수경의 집 냉장고에서 과일 통조림과 우유가 나오면서 북한 주민들은 도대체 남한 사람들은 얼마나 잘 사는거냐면서 어안이 벙벙했다는 후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