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전완수 기자] 칭다오맥주는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맥주이다. 지난 일본제품 불매운동 당시에는 수입맥주 1위를 차지할 정도이다.
이런 칭다오맥주는 제국주의의 약탈의 역사와 함께 우리나라 역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청일전쟁은 그야말로 중국의 맥주 역사를 바꿨다.
청일전쟁 발발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자 조선 조정은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다.
청나라는 아산만을 통해 2800명의 병사를 파병하고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에게 파병 사실을 알렸다. 일본은 일본 거류민과 공사관을 보호하기 위해 일정 정도의 병력을 주둔시킬 수 있다는 제물포 조약 조항에 의거해 8천명의 병력을 인천만으로 파병했다.
동학농민군들은 외세가 조선땅에 침범된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면서 조선 조정과 화약을 맺었고, 조선 조정은 청나라와 일본에게 모두 군대를 철수시키라고 했지만 일본군은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자 청나라와 갈등이 벌어지면서 청일전쟁이 발발했고, 일본이 승리를 했다.
하지만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실속이 없었다. 한반도는 물론 중국 동부 해안 지역을 차지했지만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압박을 가했기 때문에 중국 동부 해안 지역을 반환해야 했다.
독일 산둥반도 점령
일본이 중국 동부 해안 지역을 청나라에 반환했지만 독일 군대는 11월 산둥반도 자오저우만을 전겨 점령했다. 그리고 99년간 빌리는 조약을 청나라와 체결했다.
이에 독일군 동양함대 기지를 건설했다. 러시아는 독일 침공에 자극을 받아 1897년 12월 청나라 뤼숭항과 다롄항을 점령했다.
이에 영국, 청, 일본은 반러시아 연대를 구축했다. 그러자 러시아는 ‘로젠-니시 협약’ 카드를 꺼내 들었다. 양국이 한반도 내정을 간섭하지 않되 일본의 경제적 기득권은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반도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면서 독일은 산동반도 남쪽 칭다오에 상당한 투자를 하게 됐다. 그중 하나가 바로 맥주 산업이었다.
독일이 맥주 생산에 필요한 양질의 지하수를 발견하면서 독일인과 영국인이 합작으로 해당 지역에 공장을 짓고 1903년 준공했다. 중국 1호 맥주회사가 탄생한 것이다.
칭다오맥주는 1906년 뮌헨국제박람회에서 금상을 받으면서 국제사회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러일전쟁 이후
그런데 이번에 일본제국주의가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편입했다.
그리고 1910년 일본은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했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는데 독일이 1차 대전에서 패전을 하면서 칭다오 맥주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이때 독일은 전쟁 배상금 대신 중국내 조차지의 운영권을 일본에게 넘기게 됐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일본이 1922년 자오저우만을 중국에 반환하면서 중국 영토가 됐다. 하지만 칭다오맥주는 계속해서 일본인 소유가 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중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
1945년 일본이 패망을 하면서 칭다오 맥주는 중국 국민당 소유 회사였다. 이는 1949년까지이고, 이후 중국 공산당이 중국 전역을 차지하면서 국영기업으로 바뀌어 지금의 ‘칭다오맥주유한공사’가 됐다.
한때 국민당이 소유했다는 이유 때문에 대만에서는 서류상으로 국민당 소유로 아직까지 남아있으면서 지금까지도 대만 내에서는 정쟁의 도구로 칭다오맥주를 사용해오고 있다. 대만이 1당 독재형태가 지속되면서 2017년 민진당 차이잉원 정권에서 국민당의 재산을 압류해 정부 재산으로 귀속시키려하자 갑자기 대만 내에서 이 회사의 소유권에 대한 논쟁이 불거졌다. 다만 칭다오맥주유한공사는 중국 공산당 소유이기 때문에 대만에서의 분쟁은 실소유권의 분쟁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