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지난 29일 밤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해밀턴 호텔 인근 골목에 수만명의 인파가 몰리면서 최소 154명이 압사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인명피해 사고로는 2014년 304명이 희생된 세월호 참사 이후 가장 큰 규모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사망자는 외국인 26명을 포함해 총 154명이다. 부상자는 132명으로 중상이 36명, 경상이 96명이다.
성별로 보면 여성 98명, 남성 56명이다. 연령별로 보면 20대가 103명으로 가장 많고 30대 30명, 10대 11명, 40대 8명, 50대 1명, 미상 1명 순으로 파악됐다.
외국인 사망자는 14개국 26명으로 집계됐다. 국적은 이란 5명, 중국·러시아 각각 4명, 미국·일본 각각 2명, 프랑스·호주·노르웨이·오스트리아·베트남·태국·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스리랑카 1명 등이다.
이태원의 유래
이태원은 대표적인 번화가이면서 외국인, 외국 상품, 외국 문화 집결지로 유명하다. 이태원은 고려시대초 양주에 편재됐다가 남경 한양부가 관할하게 됐다.
조선시대는 한성부 성저오리로 예속됐다가, 영조 대에 성저십리로 바뀌게 됐다. 조선시대에는 이 자리에 이태원(梨泰院)이라는 역원(驛院)을 만들었다.
역원은 조선시대 사신이나 관리의 마필을 공급하고 일반 길손이 머물던 공영숙소를 말한다. 역원 주위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마을 이름도 원으로 바뀌게 됐다. 대표적으로 장호원(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일대), 조치원(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일대), 인덕원(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양2동 일대), 퇴계원(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읍 일대) 등이다.
이름이 이태원이 된 것은 배나무가 많아서이다.
조선 중기부터 일제강점기 때까지 공동묘지로
그런데 조선 중기부터 이태원 일대는 공동묘지가 형성됐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1914년 경성부를 축소하면서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으로 편입됐다가 1936년 경성대확장 때에 경성부로 편입돼 이태원정이 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태원 일대는 공동묘지였다.
하지만 새로운 택지지구로 계획되면서 개발됐고, 공동묘지가 모두 헐리게 되고, 주택가가 들어서게 됐다.
해방 이후 옛 일본군 병영 자리에 미8군이 주둔하면서 용산기지 인근 이태원 등이 미8군 배후지가 됐고, 한국전쟁 이후 외국인들이 몰려사는 곳이 됐다.
미8군 PX에 나오는 물자가 몰리게 되면서 상업지구가 형성됐고, 이로 인해 인구 유입이 꾸준하게 이뤄졌다. 여기에 다수의 대사관과 대사관저가 들어서면서 점차 부촌 이미지가 더욱 강해졌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이태원은 외국 문화를 수용하는 전초기지가 되면서 외국인들과 한국인들이 뒤섞이는 장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