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7월 3일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사임 발표
[역사속 오늘리뷰] 7월 3일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사임 발표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07.03 09: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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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61년 5.16 당시 박정희 소장과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모습./사진=연합뉴스
지난 1961년 5.16 당시 박정희 소장과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모습./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61년 7월 3일은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 원회의 의장이 의장직 사퇴를 선언한 날이다.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세력에 의해 최고회의의장에 앉은지 얼마 되지 않아 김종필에 의해 체포됐고, 결국 사의를 표명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갔고, 1968년 잠시 귀국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다.

장도영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5.16 쿠데타의 주역이었는지 아니면 방관자였는지 여부다. 왜냐하면 5.16 쿠데타 이전과 이후에 보인 장도영의 행보는 5.16 쿠데타에 가담했다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5.16 전후 보여준 행적

장도영은 제2공화국 출범 직후 장면 국무총리에 의해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됐다. 5.16 쿠데타 이전에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정보를 장면 당시 총리는 입수했지만 장도영은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장면 당시 총리를 안심시켰다고 한다.

육참 정도 되면 육사 8기생들이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정보를 쉽게 입수했을 것인데 장면 총리에게 쿠데타는 없을 것이라고 안심을 시켰다는 측면에서 장도영이 쿠데타에 적극 가담까지는 아니더라도 묵인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사기 충분하다.

5.16 쿠데타 발발 이후에도 장도영은 그야말로 의심스런 행보를 보인다. 적극 가담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반란을 진압한 것도 아니었다. 장도영은 훗날에도 계속해서 쿠데타 가담에 대해 “아니다”고 항변했다. 또한 방첩대장 이철희는 박정희가 이나라 족청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고 역정보를 보고하면서 상황 판단을 잘못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

장도영은 훗날 계속해서 자신은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당시 윤보선 대통령이 아군끼리 피를 흘리지 말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비록 주한미군과 이한림 제1야전군사령관이 쿠데타 진압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유보선 대통령은 유혈진압을 거부한 상황이었고, 정부 실권을 가진 장면 국무총리도 도망가서 연락이 되지 않은 상황이 되면서 장도영 역시 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수수방관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장도영이 비록 육군참모총장이었지만 전시작전권은 주한미군에게 있었기 때문에 장도영이 직접 운용할 수 있는 부대는 헌병대 일부와 30사단 내 1개 중대 정도였다. 즉, 장도영이 적극적으로 반란을 진압하려고 했다고 해도 쓸 수 있는 군대가 사실상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쿠데타 세력이 모인 6관구 사령부에 헌병까지 보냈지만 해산을 종용할 뿐 체포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과연 쿠테타를 막을 의지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군사혁명위 의장에 이어

장도영은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세력에 의해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계엄사령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국방부장관으로 추대됐다.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게 됐다.

하지만 한 달 반만인 1961년 7월 2일 반혁명 혐의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에 의해 전격 체포됐고, 그 다음날 최고회의 의장직을 사임했다.

1962년 3월 10일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상 반혁명 행위죄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으나 1962년 5월 2일 형집행 면제로 풀려났고 바로 미국으로 떠났다. 1968년에 잠시 귀국해 박정희와 만났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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