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원진레이온, 그리고 삼성과 포스코
[역사속 경제리뷰] 원진레이온, 그리고 삼성과 포스코
  • 박영주 기자
  • 승인 2023.07.05 10: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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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진레이온 닮은 꼴…고개 숙인 삼성, 외면하는 포스코
포스코 최정우, 소통‧사회공헌 일성에도 죽어나가는 직원들

[파이낸셜리뷰=박영주 기자] “빨간꽃 노란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중략)…흰 눈이 온 세상에 소복소복 쌓이면, 하얀 공장 하얀 불빛 새하얀 얼굴들,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저물도록,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80년대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적나라하게 담아낸 민중가요 ‘사계’의 가사 일부다. 당시 노동자들은 밤낮없이, 그야말로 청춘이 저물도록 ‘미싱’이라 불리는 재봉틀을 돌려가며 일을 했다. 

잘도 돌아가는 미싱, 급격한 산업화가 이뤄지던 시기에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최악의 산업재해가 있었다. 바로 ‘원진레이온 참사’다.  

과거 박정희 정부는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친일파 1호로 불리는 화신그룹 총수 박흥식의 주도 하에 일본 동양레이온으로부터 노후화된 중고기계를 들여왔다. 

1964년 들여온 이 중고기계를 바탕으로 1966년 경기도 미금시에 ‘흥한화섬’이라는 회사가 만들어졌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공장 기공식에 참석할 정도로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본거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후 원진산업이 이를 인수해 이름이 원진레이온으로 바뀌었다. 

한때 직원수 3000여명에 달했던 대기업 원진레이온은 꿈의 직장이었다. 하지만 직원들과 동네 주민들을 중심으로 죽음의 릴레이가 시작되면서 꿈의 직장은 ‘공포의 직장’이 돼버렸다. 

이유도 없이 주민들이 픽픽 쓰러지고 10명이 넘는 이들이 목을 매 자살하는가 하면 직원들 역시 극심한 두통을 호소하다 팔다리 마비, 언어장애, 정신착란 증상을 보였다. 최종적으로 사망자만 127명, 중독환자는 1000명이 넘었다. 

원진레이온 참사와 관련해 보도한 경향신문 지면/사진=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원진레이온 참사와 관련해 보도한 경향신문 지면/사진=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원진레이온 참사의 원인은 ‘이황화탄소 중독’이었다.

레이온이라 불리는 인견사는 양복안감이나 속옷에 쓰이는 실인데, 이를 생산하는 과정에 이황화탄소가 사용됐다. 중독되면 흥분‧불안 등 정신착란에 두통‧뇌경색‧구토‧경련‧사지마비 증상은 물론 간과 신장의 손상 등 다양한 양상을 보이게 된다. 심하면 사망으로까지 이어진다. 

원진레이온은 설립초기부터 노후된 기기에서 발생한 불순물인 이황화탄소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고, 환기설비를 설치했음에도 직원 대부분이 호흡하는 과정에서 중독되고 말았다. 

1981년 첫 중독환자가 나왔지만, 정부에서는 이렇다 할 관심을 갖지 않았고 1986년 당시 노동부는 원진레이온을 2만5000시간 무재해 달성으로 표창하기까지 했다. 죽음의 행렬이 이어지는 회사에 무재해 표창이라니 말도 안된다는 울분이 쏟아졌다.  

사건의 변곡점이 된 것은 ‘88올림픽’이었다. 

당시 원진레이온 직업병 피해자 가족 협의회(이하 원가협)는 올림픽 성화가 원진레이온 회사 근처를 지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성화 봉송로를 막아 전세계에 원진레이온 참사를 알리려했고, 이를 알아챈 정부가 그제서야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1989년에는 29명에 불과했던 직업병 인정 근로자는 1990년에는 111명, 1993년에는 257명으로 늘어났다. 이 과정에서 직업병 인정을 받지 못한 근로자들도 많았다. 

정부에서는 원진레이온 회사를 폐쇄하는 형태로 빠르게 사태를 봉합하려 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 등 제야운동가들과 시민들의 계속된 투쟁으로 비영리공익법인 ‘원진직업병관리재단’이 설립됐고 구리시 인창동에 ‘원진녹색병원’이 만들어졌다. 

원진레이온 참사는 최악의 산업재해였지만 직업병 인정, 재단 설립, 민간전문병원 및 연구소 설립까지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답변하는 포스코 그룹 최정우 회장./사진=연합뉴스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답변하는 포스코 그룹 최정우 회장./사진=연합뉴스

원진레이온 닮은 꼴…고개 숙인 삼성, 외면하는 포스코 
포스코 최정우, 소통‧사회공헌 일성에도 죽어나가는 직원들

원진레이온 참사 이후 비슷한 일들은 계속되고 있다. 일례로 삼성전자 백혈병 사건과 포스코의 직업암 사건이 대표적이다. 

지난 2007년 3월 삼성 반도체3라인에서 근무하던 故황유미 씨가 희귀병을 얻어 23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을 시작으로, 노동자들에게서 백혈병이 집단 발병해 76명이 사망했다. 베트남 공장에서는 메탄올 중독으로 노동자가 실명하는 일까지 있었다. 

시민단체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은 사망한 노동자들이 발암물질인 감광제와 유기용제 등 각종 화학물질이 즐비한 곳에서 일을 해왔다는 점을 지적하며 삼성을 상대로 투쟁을 이어갔고, 11년이 지난 2018년 사측의 사과를 이끌어냈다. 

당시 김기남 삼성전자 사장은 “병으로 고통받은 근로자와 그 가족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고개를 숙였고 김지형 조정위원장, 황상기 반올림 대표, 피해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중재판정서 합의이행 협약식’이 진행됐다. 

회사가 지원보상위원장이 정하는 세부사항에 따라 2028년까지 보상이 차질없이 이뤄지도록 최대한의 지원을 다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홈페이지에 사과문과 지원보상 안내문도 게재했고 산업안전보건 발전기금 500억원을 기탁하기도 했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부족하다 느낄 수 있지만 삼성이 고개를 숙이고 대책 마련에 나선 것과 달리, 포스코에서는 여전히 피해 호소를 외면하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
 
현재 포스코건설, 포항제철, 광양제철 등 3곳에서 5년 동안 42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었다는 지적이 나온데다가 포스코 광양제철소와 포스코 포항제철소 인근 주민들을 중심으로 대기오염 피해 호소가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코 최정우 회장은 이렇다 할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금속노조 포스코지회 등에 따르면, 최정우 회장이 취임한 2018년부터 최근까지 안전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투자했음에도 포스코 사업장 내에서만 10명이 넘는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아예 직업병 문제나 주민불편과 관련해서는 언급조차 없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포스코는 폐암 진단을 받은 광양제철소 노동자에게 “20년 동안 흡연한 이력이 있어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반박했고, 석탄분진과 석면 등에 장기간 노출돼 폐섬유증‧폐기종 소견을 받은 노동자에게 “작업환경측정결과 법적 노출 기준보다 낮았다”며 반박한 바 있다. 

사실상 포스코가 직업병을 인정하지 않고 노동자 개인에게 잘못을 돌리는 것인데, 이는 과거 원진레이온 사례와 매우 흡사하다. 원진레이온은 불편함을 호소하는 직원들에게 “술마시고 담배 많이 피니까 체력이 그 모양”이라며 핀단을 주고 중증마비에 걸린 이들을 보상없이 내쫓은 바 있다. 

포스코 최정우 회장은 취임 일성으로 ‘소통과 사회공헌’을 약속하고, 최근에는 포항·광양 등 국내에 73조를 투자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직업병 논란과 관련한 언급은 없었다. 포스코 노조는 사측과 끝나지 않은 싸움을 계속 이어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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