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8월 14일 일본 패망 그리고 궁성사건 발발
[역사속 오늘리뷰] 8월 14일 일본 패망 그리고 궁성사건 발발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08.14 0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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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히토 일본 국왕
히로히토 일본 국왕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45년 8월 14일은 일본 제국 최후의 쿠데타인 궁성사건이 발발한 날이다. 군국주의 군인들의 최후의 발악이다.

만약 이 쿠데타가 성공했다면 일본땅에 히로시마, 나가사키 이외에 여러 도시에 원자폭탄이 투하됐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만큼 일본 군국주의는 무리수를 두고 있었고, 일본 국민에게 총옥쇄를 강요하는 등 광기의 시대였다.

두 차례 원폭 투하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 제국이 패배하면서 연합군의 일본 본토 침공이 현실화됐다.

그리고 1945년 3월 도쿄대공습으로 일본의 전투능력은 사실상 ‘제로’가 됐다. 즉, 전쟁을 도저히 이어갈 수 없는 사태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은 계속 전쟁 의지를 불태웠다.

1945년 7월 26일 포츠담 선언에서는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은 끝까지 결사항전을 외쳤다. 무엇보다 1억명 국민 모두 미군 1명이라도 죽이고 자결하라는 1억 총옥쇄를 요구했다.

이에 결국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그러면서 일본 천왕은 항복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항복 논의 했던 어전회의

8월 12일과 13일 걸쳐 어전회의 및 군 수뇌부 회의를 했다. 수많은 갑론을박이 벌어졌지만 일단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고, 항복 후 천왕제 유지를 협상 조건으로 내걸자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하지만 육군 수뇌부는 결호작전을 토대로 결사항전을 주장하고 있었다. 어전회의를 끝내고 난 후 육군 소장파 장군들은 어전회의 결론을 반대하면서 쿠데타를 일으킬 준비를 했다. 쿠데타를 성공시키면 ‘결호작전’을 통해 미국과 끝까지 싸우겠다는 것이다. 이에 궁성 사건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 그렇게 14일 아침이 밝아왔다.

항복문서에 서명

어전회의 이후 14일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육군 소장파는 군 수뇌부를 찾아다니면서 쿠데타 가담을 요청했지만 군 수뇌부는 거절했다. 이에 육군 소장파는 동지들을 규합하면서 쿠데타에 호응할 인물을 찾아 나섰다.

14일 밤 23시 30분 천왕은 무조건 항복 내용을 담은 옥음방송 녹음을 끝냈다. 이에 옥음방송 녹음 레코드를 탈취 시도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쿠데타 세력에게 계산에 없던 일이 발생했다. 미군 폭격기가 도쿄 상공에 나타나면서 전기가 끊긴 것이다.

갑작스런 정전에 쿠데타 세력은 우왕좌왕했고, 결국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채 쿠데타를 결행했다.

하지만 항복방송 녹음 레코드 확보하는데 실패했다. 여기에 쿠데타군의 목표였던 항복파 대신들은 피신을 했다. 게다가 군 수뇌부에서도 쿠데타에 대해 동조를 하지 않았다. 이에 항복파 대신들은 병력을 동원해 쿠데타를 진압하기 시작했다.

결국 쿠데타 세력은 쿠데타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했고, 주동자 중 한 사람은 유서를 남기고 자결을 했다. 이것이 8월 15일 오전 11시이다. 그리고 1시간 뒤 항복하는 옥음방송이 일본 전역에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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